매일신문

[류동학의 동양학 이야기]4대에 걸쳐 이상룡 등 독립운동가 9명 배출

고성 이씨 산실 임청각과 대구 서씨의 산실 소호헌

이번에 혜명동양학연구회 회원 30여명과 안동지역의 역사문화탐방을 했다. 안동지역은 주로 퇴계학맥을 이은 가문들이 학맥과 혼맥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임청각이라는 고택에서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을 비롯해 4대에 걸쳐 무려 9명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났다. 석주와 함께 간도 망명을 떠났던 당숙 이승화(애족장), 석주의 아우인 이상동(애족장), 이봉희(독립장), 조카로 상동의 아들인 이운형(애족장), 이형국(애국장), 이봉희의 아들인 이광민(독립장), 친아들 이준형(애국장), 친손자 이병화(독립장)가 그들이다.

고성 이씨의 대표적인 인물로 세종 때 청백리로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 용헌(容軒) 이원(李原:1368~1429)이 있다. 이원의 일곱 아들 가운데 여섯째 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안동의 입향조이다. 이증의 둘째 아들 이굉이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수하는 와부탄에 귀래정(歸來亭)을 건립하고, 셋째 아들 이명이 보물 182호로 지정된 임청각(臨淸閣)을 건립한다. 이명의 막내아들 이굉(李肱)도 반구정(伴鷗亭)을 건립하여, 이굉의 아들 이용이 만년을 보냈다. 그로부터 400년 동안 후손들 대부분이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은둔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임청각 출신 한 여성이 함재 서해(1537~1559)에게 출가하여, 대구 서씨를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올린 약봉 서성(1558~1631)을 안동시 일직면 소호헌(보물 475호)에서 낳았다. 이 사람이 이명의 다섯째 아들 무금정 이고(無禁亭 李股)의 무남독녀이다. 약봉의 어머니는 약봉이 두살 때 남편이 23세로 요절하자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여 한양의 약현(藥峴)으로 이사하면서 자녀 교육에 앞장서 문과 급제자 105명, 3대 정승에 3대 대제학, 8대가 연속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등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대구 서씨의 산파 역할을 했다.

고성 이씨가 약봉 서성을 키우면서 만들어 판 것이 지금의 약주, 약식, 약과의 명칭이 되었다. 약봉은 부친이 퇴계학맥을 이었으나 본인은 기호학파의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의 학맥을 이어서 사계 김장생과 동문수학하여 5도 관찰사와 3조의 판서를 역임해 '행정의 달인'으로 통했다. 약봉의 네 아들 경우·경수·경빈·경주 중에서 서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서경주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다. 4형제 중에서도 둘째 경수와 넷째 경주의 집이 특히 번창하여 경수의 현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이 영조비가 되고, 종제의 현손 서용보(徐龍輔)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서경주의 집에서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나왔다. 또 서명응·서호수·서유구의 3대는 다 같이 문명이 높았다. 이와 같이 약봉집은 선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약 300년간 정계를 주름잡았으며, 구한말 개화파의 서광범과 서재필 등을 배출했다. 현재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도 이 집안 출신이다. 임청각 출신의 한 여성이 외동아들을 잘 가르쳐 손자 4명-증손 15명-현손 53명의 대가족을 이루면서 모두 현달시킨 위대한 한국의 어머니가 되었다.

한편 임청각 이명의 손자 이용의 딸이 서애의 형인 겸암 류운룡가로 출가한다. 이분이 서애의 형수인 고성 이씨이다. 이명의 증손 이복원의 큰딸이 임진왜란 때 순국한 호남의 명문가인 창평 고씨 제봉 고경명의 맏며느리로 출가한다. 서애 이후 270년 만에 영남사람으로 흥선군 때 재상에 오른 서애의 후손 류후조의 외가도 임청각이다. 애국시인 이육사의 종고모도 임청각 출신으로 퇴계의 진성이씨가로 출가한다. 이런 면에서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전통 사회에서 '현모양처'의 산실 역할을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고택이라 할 수 있다. 임청각의 산실방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역사를 감상하는 것도 매우 좋을 듯 싶다.

혜명동양학연구원장(다음카페-혜명동양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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