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사랑 받는 '추노'가 되려면

아리따운 노비가 있었다. 그 노비를 사랑한 남자 노비가 있었다. 남자 노비는 노비가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 남자 노비를 현혹하는 가짜 양반노비도 있었다. 양반의 노리개나 개(犬)처럼 묵묵히 일하는 노비가 있었고, 불만을 품은 노비도 있었다. 양반출신 가짜 노비는 불온한(?) 꿈을 꾸는 노비들을 싹쓸이하기 위해 노비 세상에 파견됐다. 그는 검술이 뛰어났다. 검술이 뛰어난 가짜 노비는 양반을 노비로, 노비를 양반으로 바꾸는 세상을 말했다. 진짜 노비들에겐 달콤한 말이었다. 아리따운 노비를 사랑한 남자 노비는 이상했다. 노비가 없는 세상이 아니라 양반을 노비로 만드는 세상?

또 다른 아리따운 노비를 사랑한 젊은 양반도 있었다. 그 양반도 노비가 없는 세상을 말했다. 노비를 사랑할 수 없는 양반세상을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추위에 떠는 아리따운 노비에게 불에 달군 따뜻한 돌을 몰래 전해주기도 했다. 젊은 양반은 도망노비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노비를 찾기 위해 추노가 됐다.

조선시대 '추노'란 계층은 실제 없었지만, 지방선거를 앞두고 최근 종영한 팩션(faction) 드라마 '추노'가 떠오른다.

6'2지방선거를 앞두고 어떤 인사들은 '불출마'를 말했고, 어떤 인사들은 유력 정당의 '공천'을 따냈다.

현직 단체장 3명과 대구시장 선거에 나섰던 서상기 국회의원 등이 잇따라 불출마를 선언했다. 일부 단체장은 같은 당 소속 국회의원들과의 관계 때문에 공천여부가 불투명하다. 반면 김범일 대구시장과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등은 경선을 치르지 않은 채 유력 정당의 단독후보가 됐다.

불출마를 선언했건, 공천을 따냈건 그 뒤에는 국회의원들이 있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시장, 도지사, 시'도의원 후보 등 해당 정당의 대표 주자를 낙점한다는 게 일면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출마를 하느냐 마느냐부터 대표주자 선발권까지 국회의원에게 100% 주어진 것은 아니다. 국회의원이 국민의 대표이지만, 권력의 강도와 범위의 차이가 있을 뿐 시장과 도지사, 지방의원도 역시 시도민의 대표다.

국가적 대사나 지역 현안은 돌보지 않은 채 지역구 인사들의 출마 여부에 개입하며 권력 남용에만 몰두하는 국회의원은 '양반을 노비로 만들겠다'고 현혹하는 양반 출신 가짜 노비에 다름 아니다. 가짜 노비는 노비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칼을 빼들었다. 시도민들은 권력만 좇으며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는 국회의원에 대해 2년 뒤 총선에서 어떤 대접을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김범일 대구시장과 김관용 경북도지사 주변은 들뜬 분위기가 역력하다. 본선보다 훨씬 더 힘든 예선을 쉽게 통과한 시장과 도지사에게 축하가 이어진다. 치열한 경선을 치르지 않은 채 부전승하고, 가벼운(?) 본선만 남겨뒀다고 샴페인을 터트리기엔 이르다. 김연아도, 이승엽도, 박지성도 힘겨운 무명시절을 겪었기에 아픔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 게다. 피땀 흘리지 않고, 치열한 경선을 수없이 돌파하지 않고 국민의 사랑을 받는 스타는 없다. 두 광역단체장은 국회의원을 비롯한 공천심사위원과 해당 정당이 일단 합격점을 줬지만, 아직 시도민이 합격점을 준 것은 아니다.

게다가 대구경북은 여전히 배가 너무 고프다. 청년은 실업을, 직장인은 노후를, 주부들은 가계살림을, 기업인들은 경기를 걱정하고 있다. 교육과 의료, 복지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그늘진 곳도 많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노비가 없는 좋은 세상이다. 조선시대 노비 없는 사회를 위해 부단히 싸워온 결과다. 이젠 신분이 아니라 삶의 질이 문제다.

국회의원과 시장, 도지사가 도망노비를 잡는 추노나 권력욕만 좇는 가짜 노비가 아니라 도망치는 교육과 의료, 경제를 잡는 추노가 된다면 국민의 진정한 사랑을 받을 수 있을 터이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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