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살에 소아암이 온 미야코시 유키나는 '건전지가 다하는 날까지'라는 깜찍한 시를 남겼다. 생명은 굉장히 소중하며,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건전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아직 건전지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을 보면 슬퍼진다며, 마지막까지 의미 있는 삶에 대하여 노래했다. 작지만 힘 있는 이 동시 때문에 나는 호스피스를 시작했다.
퇴근 무렵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 한통을 받았다. "선생님, 저희 아이가 통증이 심해서 상담하고 싶습니다." "어머님, 저는 말기암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책임 의사입니다. 전화를 잘못 하신 것은 아닌지요?" "저희 아이가 말기 암환자입니다."
한국인의 정서상 부모가 어린 자녀를 호스피스에 데려오는 경우는 드물다. 이렇게 해서 나의 환자가 된 루시아는 평온관 식구들의 사랑을 받으며 통증조절을 시작했다. 키가 170㎝이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눈부실 정도로 뽀얀 루시아는 스무살이다.
2년 전 대장암수술을 두번이나 하고 항암치료도 했다. 그녀는 지난해 가을부터 완치를 위한 치료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서, 집에서 가정간호를 받으면서 지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통증이 심해지자, 가정간호사의 소개로 평온관 외래로 오게 된 것이다.
루시아는 통증평가는 10까지밖에 없음에도 불구, 통증 20(통증 7은 산통)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꽉 물고 온몸을 구부렸다. 처음에는 모르핀으로 통증 조절이 가능했지만, 집으로 돌아갈 무렵 다시 돌발성 통증이 시작됐다. 적당량의 모르핀을 투여했지만, 이번에는 통증이 조절되지가 않았다. 평소 집에서 루시아는 자기 방에 동생들도 못 들어오게 하고 혼자 지낸다고 했다.
"루시아, 너 죽음이 무섭지? 의사인 아줌마도 무섭단다. 죽지 않았는데 벌써 죽은 시늉을 하면서 집에서 지내고 있지? 동생한테 나쁜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네 방에도 못 들어오게 하면서…." 나는 용기를 내어서 그녀 앞에서 죽음이라는 말을 했다.
루시아는 긴 팔로 두 눈을 가린 채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의 통증은 사라졌다. 2년 동안 루시아와 그녀의 어머니는 죽음이라는 말을 한번도 꺼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죽음은 루시아 혼자 고민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주제였다. 평온관에서는 모르핀만으로 통증을 조절하지는 않는다. 마음의 고통을 보살펴주는 것이 암성통증을 조절하는 지름길이다.
루시아의 소원은 남자친구를 만드는 것과 다시는 아픈 시술을 받지 않는 것이다. 오늘 그녀는 급성신부전으로 콩팥에 관을 넣어서 소변이 나오게 하는 시술을 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서 나는 '건전지가 다하는 날까지'를 읽어주었다.
김여환<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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