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8년째 병마와 싸워…' 골수이형성증후군 투병 김요섭씨

골수이형성증후군을 앓고 있는 김요섭씨는 현재 2차례에 걸친 골수이식의 후유증으로 인한 숙주반응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입술이 터지고, 피부는 벗겨지고, 장출혈이 계속되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 류영옥(50)씨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골수이형성증후군을 앓고 있는 김요섭씨는 현재 2차례에 걸친 골수이식의 후유증으로 인한 숙주반응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입술이 터지고, 피부는 벗겨지고, 장출혈이 계속되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 류영옥(50)씨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엄마, 나 좀 제발 살려줘."

장성한 아들이 저(류영옥·50·대구 중구 대봉동)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 고통에 찬 몸부림을 보고 있노라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차라리 대신 아파줄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참담한 기분은 아닐 겁니다. 고통과 싸우고 있는 자식 앞에 눈물을 보일 수는 없어 입 안쪽으로 입술을 꽉 깨물어보지만 주책없는 눈물은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고 코끝은 찡하게 시려옵니다.

◆고 1때 발병해 8년째 투병 중

하나뿐인 제 아들 요섭이(24)는'골수이형성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백혈병과 흡사한 병으로 체내에서 혈소판이 만들어지지 않는 병이라고 하더군요. 처음 진단을 받은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때였으니까 벌써 8년째 병마와 싸우고 있는 셈입니다.

처음 요섭이가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여름방학을 끝내고 개학했을 무렵이었습니다. 감기 증세가 심해 동네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선생님이 요섭이 눈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피검사를 해보자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그 길로 경대 병원 무균실에 입원해 각종 검사를 받고 '골수이형성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름도 낯선 병이라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행히 요섭이가 잘 버텨줘서 7년 동안은 별다른 치료 없이 약을 복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7월부터 요섭이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에 한번씩 혈소판과 혈액 수혈을 받아야 했고, 항암치료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들

올 1월에는 마지막 방법인 골수이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골수이식이 요섭이에게는 별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이식이 실패한 겁니다. 그래서 올 3월 2차 골수이식을 받았는데 이후 요섭이는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식된 골수가 자신에게 적합한 지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심한 숙주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겁니다. 벌써 열흘 넘게 아무것도 먹질 못하고 설사와 장출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입술은 부르터 엉망진창이 됐고, 피부는 다 벗겨졌습니다.

너무 힘겹다보니 착하기만 했던 아들이 "나 좀 살려달라"며 울부짖습니다. 이 고비만 넘어서면 생과 사의 갈림길을 넘어설 수 있을텐데, 이 힘겨운 싸움에서 아무런 힘이 되어줄 수 없는 엄마인 것이 너무나 미안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저는 벌써 몇달째 병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 요섭이의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계속된 병원생활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젠 집에서 잠을 자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합니다. 요섭이가 무균실에서 지낸 것만도 벌써 5개월이니까요. 최근 몇 주 동안은 아예 무균실에서 24시간 생활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무균실은 원칙상 잠시의 면회만 허용되는 공간이지만 요섭이의 상태가 워낙 좋질 않다보니 병원 측에서 제가 24시간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요섭이도 병원생활이 진저리가 나는지 의사선생님이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에 "집에 가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싶다"고 합니다. 저 역시 온가족이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는 소소한 일상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립습니다.

◆제 아들이 다시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저와 남편은 섬유업체에서 함께 일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섭이의 병이 심해지면서 남편과 저는 동시에 일을 그만둬야 했지요. 저는 간호에 매달려야 했고, 남편 역시 일이 있을 때마다 달려와야 하다보니 월급쟁이 생활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병원비는 전부 빚이 됐습니다. 재산이라야 다 허물어진 한옥집 한 채가 전부였는데 이것은 빚을 갚기조차 모자란 금액입니다. 한 차례 이식에만 수천만원이 드는 수술을 두번씩이나 했으니까요.

현재 남편이 일용직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병원에 달려와야 하는 일이 워낙 잦다보니 벌이가 100여만원을 겨우 넘어서는 수준이어서 병원비를 감당하기는 역부족입니다. 무균실 입원비만도 하루 9만원에 달해 하루하루 가슴이 죄어듭니다.

하지만 아들만 살아날 수 있다면 병원비가 대수이겠습니까. 아이들을 워낙 좋아해 아동복지를 전공하기 위해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던 요섭이. 그런 제 아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아이들과 어울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세상 어떤 고통도 다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이 엄마의 마음입니다.

오늘도 저는 아들 옆에서 입술을 깨뭅니다. 이 힘든 고통을 이겨내고 나면 아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날도 오겠지요.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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