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행]경북을 걷다-(22)영덕-블루로드

자연의 위대한 솜씨에 고개숙인 펜과 붓의 비천함이여

흔히 '쪽빛 바다'라고 표현한다. '쪽빛'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남(藍)빛'이란다. 다시 남빛을 찾았더니 '파란색과 자주색의 중간 빛'이라고 한다. 언어의 한계다. 영덕을 찾아가는 길 옆 산자락은 하루가 다르게 색깔이 바뀌고 있었다. 매주 '동행-경북을 걷다' 취재를 하면서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실감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실감할 뿐 표현할 수가 없다. 봄꽃이 피면서 산허리는 울긋불긋해졌고, 연둣빛 새 잎이 나면서 능선마다 초록의 잔치가 펼쳐진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빈약한 표현의 한계는 절망스럽다.

동행한 김윤종 화백은 "햇살을 받아서 반짝이는 연초록 잎새를 과연 어떤 색깔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며 "사람이 만든 물감으로는 그저 흉내만 낼 뿐 그 감흥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길 수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초록빛 산하'와 '쪽빛 바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경험을 전제로 한 기억되살리기에 불과하다. 단어를 듣고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더듬어 '그래, 그런 느낌!'이라고 공감할 뿐이다.

영덕 블루로드(Blue Road)를 거닐면서 새삼 어휘가 부족하고, 표현이 모자라며, 묘사가 진부함을 깨달았다. 블루로드는 영덕군 강구면 강구항을 출발해 축산항을 거쳐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르는 약 50km 구간을 일컫는다. 걸어서 17시간 걸리는 꽤 먼 길이다.

크게 3구간으로 나뉘는데 A코스는 강구항에서 해맞이공원까지 17.5km(6시간), B코스는 해맞이공원에서 죽도산(축산항)까지 15km(5시간), C코스는 죽도산에서 괴시리 전통마을을 거쳐 고래불까지 17.5km(6시간)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구간도 적잖기 때문에 차량 통행이 많은 여름 피서철은 피하는 게 좋다. 오히려 봄, 가을이 블루로드를 탐방하기에는 제격이다.

##초록빛 산하'쪽빛 바다의 어울림

특히 B코스는 갯바위와 해송숲을 거닐 수 있는 숨겨진 보물같은 구간. 오늘 걷는 구간은 B코스 중 석리(석동마을)에서 축산항까지 6km 남짓한 길. 제법 가파르고 날카로운 바윗길이 있어서 편한 운동화나 등산화가 필수. 어린이가 걷기에는 조금 위험하다.

하루, 이틀쯤 묵으면서 블루로드 전 구간을 답사하면 좋겠지만 형편상 압축해서 걸어보자. 7번 국도를 따라 영덕으로 가다가 해맞이공원으로 접어들자. 거기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오보해수욕장을 지나 석리에 닿는다. 답사 출발점이다.

마을 안쪽 바닷가에 예쁜 정자가 보이고 차를 댈 수 있는 제법 너른 주차장도 있다. 목적지인 축산항까지 갔다가 해안도로를 따라 운행하는 시내버스(영해~축산)를 타고 다시 석리로 돌아오면 된다. 사실 오늘 걷는 길은 '블루로드'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전까지 숨겨진 길이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군부대 해안초소가 곳곳에 자리 잡아 민간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후 출입통제가 풀렸지만 여전히 바다낚시 마니아들이나 알음알음 찾아올 정도였다. 길 찾기도 어렵고 갯바위길은 꽤 험준했다.

석리를 출발하면 경정3리, 경정1리를 지나 경정2리(대게원조마을로 알려진 차유마을)를 거친 뒤 축산항에 닿는다. 길에서 만난 가장 낯선 풍경은 무너진 해안초소다. 담벼락은 무너졌고, 얼기설기 지어올린 지붕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한때 이곳에서 수많은 청춘들이 밤바다를 응시하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폈으리라. 아직도 남아있는 경고 표지판에는 '간첩(불순분자)으로 오인돼 안전사고가 우려되는 군사작전 지역'이라고 적혀있다. 한 평도 채 안 되는 그 초소에 들어가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젖어본다.

경정3리에 가면 '오매향나무'를 만날 수 있다. 원래 경정3리는 오두산(烏頭山)과 매화산(梅花山)에 둘러싸여 '오매'라고 불렸고, 뒷산 모습이 까마귀가 춤추는 것 같다해서 '오무'(烏舞)라 부르기도 했다. 마을 아래 마을신을 모시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데, 수령 500년이 넘는 향나무가 언덕 전체를 뒤덮고 있다. 처음 권씨들이 마을을 개척할 때 대나무, 향나무, 소나무를 심었는데,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다른 나무는 죽고 지금의 모습만 남았다고 전해진다. 언덕 아래 묶인 배 한 척까지 보태니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저 멀리 시뻘겋게 녹이 쓴 철 구조물이 보인다. 길 안내를 맡은 영덕군청 백인식 관광기획담당은 "근처에 있는 돌산에서 석재를 캔 뒤 배로 실어나르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얼핏 봐도 길이가 100m는 돼 보인다. 곳곳에 흩어진 해안초소와 거대한 팔을 뻗듯이 바다로 난 붉은 철구조물. 세월은 흐르고 기억은 보태진다.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는 이 길을 찾는 사람들의 몫이리라.

##출입통제에 숨어 있다 드러난 보배

길이 끝나가면서 저 멀리 축산항과 죽도산이 보인다. 축산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새로 다리가 생겼다. 사람만 건널 수 있는 폭이 좁은 현수교이지만 규모가 상당하다. 교각 옆에는 마을 사람 10여명이 나와서 무언가를 건져내고 있다. 제법 파도가 세찬 날이었는데, 기다란 장대를 이용해서 파도에 쓸려온 것을 건져내기에 여념이 없다. 백인식씨는 "돌미역을 건지고 있는 것"이라며 "매년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2, 3주 정도 이렇게 자연산 돌미역을 건져낸다"고 했다. 일 년에 한번씩 바다가 가져다주는 선물인 셈이다. 한 할머니는 "오늘처럼 파도가 센 날은 배도 못 뜨는데, 이렇게 미역이라도 건지면 짭짤한 수입이 된다"며 웃어보였다. 어른 가슴까지 닿는 높은 파도가 밀려오면 마치 물놀이를 나온 어린아이마냥 뒷걸음질쳤다가 이내 몸을 돌려 미역 한 줄기라도 더 건지려고 달려나갔다.

비록 인간의 발자취 속에 제 모습을 잃기는 했어도 이곳 바닷길의 풍경은 가히 명품이다. 특히 차유마을에서 축산항으로 이어지는 해송숲길은 인적이 드물었던 덕분에 남아있는 귀한 곳이다. 수십m 높이의 해송이 마치 키재기라도 하듯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다. 짭짤한 바다내음과 솔향이 묘한 어울림을 자아낸다. 바위 모양도 제각각이다. 김윤종 화백은 "바닷가에 콘크리트 더미가 이렇게 많이 쌓여있느냐"고 푸념했다. 가만히 봤더니 콘크리트가 아니라 역암이다. 누가봐도 자갈 콘크리트로 착각할 정도로, 크고 작은 자갈들이 바위속에 박혀있다. 어느 구간에는 녹이 슨 듯 온통 붉은색으로 물든 바위도 있다. 자연 그대로의 박물관인 셈이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영덕군청 관광기획담당 백인식 054)730-6533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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