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國恥百年](25)침략자본의 노동력 착취와 노동운동

여성 섬유노동자, 고통의 실로 피맺힌 恨을 짜다

일본 자본가들은 조선 노동자들을 저임금에다 휴일도 없이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는 노동 착취의 현장으로 내몰았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에겐 노동은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전쟁과도 같은 고역이었다.
일본 자본가들은 조선 노동자들을 저임금에다 휴일도 없이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는 노동 착취의 현장으로 내몰았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에겐 노동은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전쟁과도 같은 고역이었다.
일제 당시 조선생사 여성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전개한다는 기사와 혁명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 발각됐다는 기사.
일제 당시 조선생사 여성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전개한다는 기사와 혁명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 발각됐다는 기사.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은 일본 자본가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금융을 포함한 온갖 특혜에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이 있어 막대한 자본을 손쉽게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다퉈 조선에 진출한 일본 자본가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공장을 세웠고 대구에도 대규모 공장을 세웠다. 1910년대 후반에 세워진 야마쥬제사, 가타쿠라제사, 조선생사와 같은 공장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공장은 전국의 제사공장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대구가 섬유도시라는 명성은 이때부터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구는 경북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한 중간 집결지였다. 쌀은 경부선을 통해 수출되었기 때문이다. 대구역 부근인 달성동과 원대동에는 쌀을 도정하는 30여 개의 정미소가 있었고 쌀을 보관하는 대규모 창고도 많이 세워졌다. 자연히 정미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쌀을 나르는 운반 노동자도 급증했다. 성냥, 양말, 인쇄업 등 영세 공장들도 생겨났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휴일도 없이 거의 일 년 내내 하루 12시간 넘게 일했지만 저임금으로 고통받았다. 조선 노동자는 일본 노동자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았으며 여성 노동자는 남성 노동자의 절반, 심지어 4분의 1밖에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일은 노동의 기쁨이 아니라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전쟁과 같은 고역이었다.

노동자들은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을 개선하고 노동 해방과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1920년 전국 단위의 조선노동공제회를 시작으로 조선노동연맹회·조선노농총동맹·조선노동총동맹이 차례로 결성됐다. 대구에서도 조선노동공제회의 지회가 결성돼 활동하면서 광주·진주지회와 함께 가장 활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식인이 주도하고 농민 운동에 주력해 노동자의 권익 향상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양말·인쇄·재봉·목공·신문배달부조합 등 직업별 노동단체도 결성됐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부당한 대우를 시정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윤 추구에만 혈안이 된 자본가들이 들어줄 리는 만무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최후 수단인 파업을 통해 압박을 가했다. 대구에서는 제사·정미소·운수 분야 노동자의 파업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1924년 동인동에 위치한 조선생사의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여성 노동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또는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살림살이에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집을 떠난 13~17세의 꽃다운 소녀들이었다. 이들은 하루 13시간 이상 일했으며, 기숙사는 불결하고 식사는 차마 먹을 수 없어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거기에다 조선인 여성이라고 무시당했으며 심지어 폭행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이기영의 소설 '고향'의 공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인순이가 부르는 '여공의 노래'에서 그때 여성 노동자의 절절한 심정을 알 수 있다.

『베 짜고 실켜는 여직공들아 너희들 청춘이 아깝고나

일 년은 열두 달 삼백은 예순 날 누구를 위하는 길쌈이더냐?

어머니 아버지 날 보고 싶거든 인조견 왜삼팔 날 대신 보소!

공장의 굴뚝엔 연기만 솟고 이내의 가슴엔 한만 쌓이네?』

브레이크의 시처럼 여성 노동자의 인생이란 '고통의 실로 짜는 피륙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자본가가 여성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오히려 공장에서 쫓겨나거나 일제 경찰에 체포돼 감옥으로 가야 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경제공황까지 겹쳐 노동 조건이 더욱 악화되자 견디지 못한 여성 노동자가 공장을 탈출하는 일이 속출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대구에서는 정미소 노동자가 가장 많은 파업투쟁을 벌였다. 이들의 요구는 대부분 노동조건 개선, 임금 인상, 임금 인하 반대였다. 정미소 노동자와 운수 노동자가 연대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1931년에는 정미소 노동자가 작업 중에 사고로 사망하자 정미소와 운수노동자 2천여 명이 동맹파업을 하고 장례식을 같이 거행하기도 했다. 양말직공, 입자직공, 인쇄직공, 위생인부, 전매지국 노동자들도 파업을 벌였지만 제사 분야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히려 자본가의 위장폐업으로 실업자가 발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1920년대 전반기 식민지 수탈과 관련된 항구가 많은 경기·경남·전북 등지에서도 운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파업이 집중됐다. 후반기에는 새로운 공업 중심지가 조성된 평남·함남 등지에서 파업 투쟁이 많았다. 노동자의 파업 동기는 대부분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자연발생적인 투쟁이었다. 요구조건도 임금 인상과 임금 인하 반대와 같은 경제적 요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경향은 대구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비록 파업 동기와 요구 조건이 경제적인 문제에 그쳤지만 대부분의 파업은 일본 자본가와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이라는 점에서 민족적·정치적 측면의 항일운동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편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은 1920년대 후반부터 생산현장에서 노동자를 지도하고 이들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혁명적 노동조합을 결성, 활동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전국 곳곳에서 이러한 활동이 있었다. 대구에서도 전매지국과 고무공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혁명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활동이 있었고 김천·안동·왜관 등지에서도 이 같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기도 전에 일제 경찰에 발각돼 좌절되고 말았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전시체제로 이어지면서 정치적 성격을 띤 노동운동은 물론 자연발생적인 노동운동도 점차 약화되었고 노동자의 생활은 더 깊은 수렁에 빠져 들었다.

허종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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