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어도 짜증 나고 화나는 여름. 아무리 냉방시설이 잘 돼 있어도 이맘때는 우리 주변에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더위가 일상적 삶을 지탱해주는 평상심마저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직장상사와 동료, 매일 투덜대는 아내와 늘 얼굴을 맞대고 살다 보면 저절로 분노 게이지가 상승한다.
내 것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감정인 화(火).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이에 대처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을뿐더러 배웠다고 하더라도 끓어오르는 화를 참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직장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어떻게 하면 화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현대인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화를 유연하고 현명하게 다스리는 사람들의 노하우를 통해 해결해보면 어떨까.
◆화를 다스리는 사람들
대구역 앞 대우빌딩 7층에 위치한 SK텔레콤 대구2고객센터는 여름철 대구에서 가장 화가 많이 모이는 곳 중 하나다. 이곳에 근무하는 320명의 상담사들은 1인당 하루 평균 전국의 120명 이상으로부터 상담이나 불만 전화를 받는다. 그 중 52%가 수도권 지역에서 걸려오는 상담전화다. 전국에서 화가 몰려오는 셈이다.
5년째 이곳에서 상담사 업무를 하고 있는 우효주(여) 씨는 이곳에서도 '화 참기의 달인'으로 통한다. 우 씨는 입사 초기 화를 참기 힘들어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화가 난 고객이 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주장만 퍼부어대는 바람에 7시간 동안 상담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러다 몇 년 전 상담 중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화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거울을 통해 화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추해질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었어요. 아무리 천사 같은 얼굴이라도 화낼 때 모습은 공포감을 갖게 하고 낯설고 이상하게 변한답니다."
우 씨는 그 후 거울을 사무실에 비치하고 화가 날 때면 자신의 모습을 보는 습관을 가졌다. 그때부터 그는 아무리 화가 나도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화 참기의 달인이 됐다. 우 씨의 성공(?) 때문에 책상에 거울을 놓는 직원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대학 병원 내 내과 병동은 이맘때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참기 어려운 화가 쌓이는 곳이다. 더위에 지친 환자들의 짜증 섞인 화는 단순히 '욱' 하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아니다. 병원 내 가장 많은 환자들이 모이는데다 날씨는 덥고 몸은 아프니 뿜어내는 화의 농도도 단연 짙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환자들의 화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내과병동 간호사들이야말로 화 참기의 진정한 챔피언들이다.
계명대 동산병원 내과병동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오정임 씨는 자신만의 화 참기 비법이 있다. 오 씨가 자주 사용하는 비법은 '한 타임' 쉬는 것. "화는 생각하면 할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 같아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상황을 피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요. 이럴 때 길게 숨을 들이쉬고 후~ 하고 숨을 내쉬면 화를 참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화가 났을 때 잠시 감정의 방향을 돌리는 일종의 트릭인 셈이다. 오 씨는 사무실 한쪽에 '멈추고 생각하기'라고 쓴 종이를 걸어두고 화가 날 때마다 본다.
한여름 뙤약볕을 그대로 받아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도로. 그 위에서 하루 14시간씩 생활하는 택시 운전사 이정훈(40) 씨는 쉼없이 화를 내는 것이 습관이 돼 버렸다. 위험천만한 돌발 상황이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 있는 도로 상황에 처하면 어김없이 입에서 욕이 나왔다. 화를 내면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요즘 운전석 옆에 적힌 작은 문구를 보면서 화를 참는다.
"얼마 전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다 무심코 입에서 욕이 나오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혹시 아들이 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운전석 앞에 '1초만 생각하고 욕하자'는 문구를 써서 붙였어요." 단 한줄의 문구지만 이 씨를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자신도 놀랄 정도다. "화를 가라앉히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지요. 우리 주변에는 습관처럼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그만 원칙이라도 세우고 이를 실천한다면 충분히 화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던 지난 6월 말. 대구의 한 현직 경찰간부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술을 마신 뒤 말다툼을 벌이다 동거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거한 지 1년쯤 된 이들은 늦은 귀가 시간을 이유로 말다툼을 벌이다 결국 폭력으로 감정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사랑싸움에 화가 끼어들면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진 셈이다.
지난해 10월 대구 수성구의 한 평온하던 주택가 도로에서 갑작스레 두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6개월 전 부인과 이혼한 박모(45) 씨가 전 부인과 사귀는 남자에게 공기총을 발사해 배 부위에 찰과상을 입힌 것. 총을 쏜 박 씨는 "전처와 만나는 남자를 만나 말다툼 중 홧김에 공기총을 발사하게 됐다"고 했다. 경찰은 박 씨가 총기를 발사했으나 살해 의도가 없었고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보고 상해 혐의를 적용했다.
화를 참지 못해 발생하는 우발적 범죄와 현실 불만 범죄는 매년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대구경찰청에 따르면 2005년 1만5천855건이었던 우발적 폭력사건이 지난해 1만6천876건으로 5년 사이에 6.2% 증가했고, 올 들어 7월까지 8천781건을 기록하며 매년 늘고 있다. 배철호 한국치안행정학회장은 "한국사회는 유독 울분이 많다. 모든 일을 승부로 보기 때문에 분한 감정을 상대적으로 많이 느끼는데다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게임의 룰이 없고 적절한 방법으로 화를 풀 방법이 없어 우발적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 방치하면 병 된다
3년 전 말기폐암으로 수술대에 올랐던 이손진(46) 씨. 힘든 암 투병과정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이 씨는 긍정적인 생각 덕분에 암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되면서 과도한 스트레스로 화병에 걸리고 말았다. 평소에도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하고 사소한 일에도 깜짝 놀라거나 불면증에 시달린 지가 몇 달째다. 최근에는 대인관계에까지 이상이 생겨 암투병 중에도 다녔던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 씨는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잃었던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화병은 한국인에게 친근한 병이다.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일종의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분노증후군(anger syndrome, hwabyung)이란 학술용어로 규정할 정도다. 과거 감정을 억눌러야 했던 여성에게 주로 나타났던 화병이 최근 무거운 업무, 경제적 문제, 가족이나 직장 동료의 갈등 등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김정범 계명대 신경정신과 교수는 "화를 방치해 화병에 걸리게 되면 정신적인 손상뿐 아니라 신체적인 손상도 함께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자살이나 심혈관계 질환 등 돌연사로 이어질 수 있다"며 "화를 참는 것과 참지 않는 것,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지나치게 되면 건강에 적신호가 올 수 있으므로 화의 근본 원인을 없애거나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안상호 편집위원 shahn@msnet.co.kr
♣화병 자가 진단 테스트
1. 가슴이 답답하거나 숨이 막힌다. 자주, 가끔, 그렇지 않다
2. 치밀어오르는 느낌이 들어 힘이 든다. 자주, 가끔, 그렇지 않다
3.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가슴이 뜨뜻해진다. 자주, 가끔, 그렇지 않다
4. 목이나 명치 부분에 무언가 뭉쳐 있는 느낌이다. 자주, 가끔, 그렇지 않다
5.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많이 든다. 자주, 가끔,그렇지 않다
6. 마음 속에 화가 쌓여 있거나 분노가 치민다. 자주,가끔 그렇지 않다
*평가방법 : 자주 그렇다 2점, 가끔 그렇다 1점, 그렇지 않다 0점으로 4점 이상이면서 증상이 최근 6개월간 지속된다면 화병일 가능성이 높다. 점수가 높게 나온다고 해서 상심할 필요는 없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당연히 화가 나기 마련. 수치가 높게 나온다면 잠시라도 몸과 마음의 이완을 통해서 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계명대 동산병원 신경정신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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