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어둠이 깔린 저녁,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먼지를 뽀얗게 덮어쓰고 있는 액자 하나를 발견했다. 갤러리에 들고 와서 액자의 얼굴을 말갛게 닦아주니 그 속에서 멋진 수채화 한 폭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빛이 평화로워 보이는 한적한 시골 정미소의 풍경이다. 정미소 뒤쪽으로 늘어선 작은 숲은 노을빛을 받아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듯하고 비스듬히 열린 정미소 문 사이로 금방이라도 촌부가 갓 찧은 쌀가마니를 지고 나올 것 같다. 앞뜰의 너른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빨간 장미가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어쩌면 작가는 어느 시골마을을 여행하다 그 순간을 놓치면 영원히 담지 못할 추억을 화폭에 옮겼으리라.
그림을 버린 이는 누구일까. 무슨 마음이었기에 그림을 버렸을까. 작가보다 그림을 버린 이가 자꾸 궁금해진다. 물맛을 제대로 내고, 수채화의 묘미를 잘 살려낸 걸 보니 그림 맛을 아는 사람이 그린 것이 분명하다. 사인이 살아있는 걸 보면 작가가 버렸을 리는 없다. 오랫동안 걸어놓아 싫증이 난 것일까. 아니면 누구에겐가 선물로 받은 그림이 애당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보니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면서 은근히 서운한 마음이 든다.
그림 한 점 선물하기가 마음만큼 쉽지 않다. 자신의 그림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군다고 생각을 하면 어찌 아무에게나 선물을 할 수 있으랴. 온전한 그림 값을 치렀다면 이렇게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갤러리엔 제법 많은 그림이 있다. 행복한 날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일기장 같은 나의 그림과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그림이다. 진열된 그림들은 갤러리를 밝혀주는 훤한 등불 같은 역할도 하지만 삶이 나른해서 마냥 하던 붓질이 심드렁해질 때 힘과 용기를 돋워준다. 분신처럼 여기는 그림들과 사랑스런 눈길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오늘 쓰레기더미에서 내게로 온 풍경화 한 점도 언제나 눈맞춤하며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전시장 하단에 진열해 놓았더니 제 자리가 원래 거기인 양 이웃한 그림들과 잘 어우러진다. 그림이 나의 눈에 띌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인연으로 선물처럼 여겨진다.
선물은 준 사람보다 받은 사람이 오랫동안 기억하며 귀하게 여길 때 진정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주변에 선물을 아주 귀하게 여기는 분을 뵌 적이 있다. 그는 손수건 한 장, 양말 한 켤레, 책 한 권이라도 소중히 여겼으며, 그것들을 마음의 곳간에 진열해 놓고 선물 준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는 게 행복이란다.
물건은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다를 때가 많다. 나에게 하잘것없는 물건이 다른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물건이 될 수 있듯이, 선물도 받는 이가 제대로 대접을 해 줄 때 그 의미가 남달라질 것이다.
노애경 화가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