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도 분명 천사와 악마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한 주체인 소비자의 유형은 다양하지만 생산자와 판매자들이 흔히 하는 분류 중에 천사와 악마가 있다. 이른바 블랙 컨슈머(Black Consumer)와 화이트 컨슈머(White Consumer)다.
블랙 컨슈머는 잦은 반품, 불평·불만, 소비자 고발 등으로 생산자와 판매자를 수시로 괴롭히는 까다롭고 만족시키기 힘든 소비자들이다. 반대로 화이트 컨슈머는 제품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오히려 제품을 널리 알려주며 생산자와 판매자에게 힘을 주는 긍정적 마인드의 소비자들이다. 화이트 컨슈머는 어지간해선 반품이나 불평을 하지 않고, 알아서 고쳐 쓰기도 한다.
세태는 블랙 컨슈머가 대세다. 지난해 소비자보호정보센터가 국내 51개 식품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4.1%에 해당하는 48개 업체가 블랙 컨슈머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대답했다. '예전보다 블랙 컨슈머가 늘었느냐'는 질문에 82.4%에 해당하는 42개 업체가 '그렇다'고 답했다.
때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인간이라 때론 블랙 컨슈머, 때론 화이트 컨슈머일 수도 있다. 블랙 & 화이트 컨슈머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진상고객 블랙 컨슈머, '질린다 질려'
'똥 누러 갈 때 마음과 누고 난 뒤 마음이 다르다.'
물건을 사 갈 때는 모른다. 이것저것 따지고 물어도 알뜰한 고객이라 여기며 조금 귀찮아도 최선을 다해 모신다. 하지만 이내 그 물건을 들고 돌아와 '이게 왜 이러냐?' '바느질이 이상하다' '컬러가 벗겨졌다' 등 온갖 핑계를 대며 환불이나 반품을 요청하러 온다. 이런 블랙 컨슈머는 한번 악성으로 돌변하면 계속 반복되는 증상까지 보이기 일쑤다.
동아쇼핑 화장품 매장에서 근무하는 이수영(28) 씨는 최근 겪은 블랙 컨슈머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얼굴은 물론 온몸에 화를 풍기며 매장으로 들어선 그 고객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거의 다 사용한 상품을 꺼내면서 "이 제품을 쓰다 피부가 개선되기는커녕 트러블만 생겼다"며 막무가내로 책임지라고 윽박질렀다.
이 씨가 상품의 구매일자와 구매처를 물어보자 "이 회사 제품 맞잖아"라고 고함을 지르며 "빨리 환불해 달라"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환불은 영수증이 없어서 힘들다고 하자 그러면 교환을 해 달라면서 가격이 2천원 더 비싼 상품을 선택했다. 차액을 지불하라고 하니 "그럴 수 없다"며 한참을 버티던 고객은 2천원을 얼굴에 던지고 나가버렸다.
의류 매장의 권정순(37) 씨 역시 제철(3~4개월) 동안 잘 입은 옷을 시즌이 마감될 무렵 들고 와서 반품이나 환불을 요구하는 경우가 가끔 있어 곤혹스럽다고 한다. 규정에 따라 응대하자니 고객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백화점과 브랜드의 이미지에 타격이 갈 것 같고, 고객의 요구를 무조건 따라주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권 씨는 "이제는 블랙 컨슈머를 대하는 요령이 어느 정도 생겨서 선의인지 악의인지부터 따져보고 조치를 취해 준다"고 말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과 LG를 벌벌 떨게 한 '환불남'도 블랙 컨슈머의 사례로 화제가 됐다. 이 고객은 자신이 사용하던 휴대폰이 폭발했다고 강하게 항의해 삼성전자로부터 합의금을 받아냈을 뿐 아니라 수 차례에 걸쳐 구입한 제품을 환불받거나 교환했다. LG전자를 상대로는 제대로 된 애프터 서비스를 요구하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고, LG전자 사옥 앞에서 1인 시위까지 벌였다.
◆착한 고객 화이트 컨슈머, '힘난다 힘나'
'매장에 있는 판매직원에게 먹을 것을 사다주는 고객.'
언뜻 생각하기 힘든 장면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고객이 판매직원에게 음료수는 사주는 일은 다반사. 때로는 집에서 직접 가져온 먹을거리를 전해줘 주객이 바뀌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런 화이트 컨슈머는 착하지만 합리적이기도 하다. 환불이나 교환을 해야 할 때는 객관적인 입증자료를 확보하고, 동일 민원에 대한 중복 제기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판매직원이 곤란한 입장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까지 해 준다.
배희진(34·여·송현 경북약국) 약사는 화이트 컨슈머가 많아서 일하는 데 큰 힘이 된다. 단골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직접 재배한 것이라며 상추, 배추, 고추, 딸기 등을 자주 들고 온다는 것. 배 씨는 "하루종일 약국 안에서 일하는 내게는 정이 넘치고 서로를 항상 배려해주는 고객들의 분위기가 참으로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동아쇼핑 이수영(28) 씨 역시 블랙 컨슈머 10명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화이트 컨슈머 1명으로 인해 풀어진다고 했다. 비슷한 또래의 한 고객은 어느날 피부 상담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마음이 통했다. 이후 매장을 방문할 때마다 이 씨를 찾아 사소한 고민까지 나누는 사이가 됐고, 지금은 한달에 한두 번씩 음료수를 사들고 오기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는 친구처럼 관계가 발전했다.
한 백화점에서는 이런 고객도 있다고 소개했다. 예전에 맺어진 인연을 중시해 그 판매직원이 다른 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겨도 의리를 지킨다며 찾아와 계속 구매해 주고, 매년 김장철이면 집에서 직접 담은 김장김치를 소중하게 포장해 주기도 한다는 것. 판매직원 입장에서는 천사가 아닐 수 없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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