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술국치100년] 김락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

스스로 항일투쟁 앞장 선 전통여성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요즘 안동에서 매달 둘째 토요일에 공연하는 뮤지컬 '락'의 마지막 절규다. '락'은 '김락'이라는 여인의 이름이다.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인 큰 오빠 김대락을 비롯해 그 아래로 김효락, 김소락 등이 이어지니, '락'은 돌림자다. 그런데 제적등본에는 그의 이름이 그냥 '김락'으로만 적혀 있다.

그를 찾은 때는 2000년, 꼭 10년 전이다. 일제가 펴낸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 앞머리에서, "소요사태(3·1운동)에서 어머니가 일본 수비대에 끌려가 두 눈을 잃고 고생하다 돌아가셨으니, 내 어찌 이를 잊으랴"고 항변한 안동 하계마을 이동흠의 이야기를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은 경북경찰부(지금의 경북경찰청에 해당)가 독립운동가 전문 사냥꾼인 고등계 형사를 교육하려고 1934년에 펴낸 극비자료인데, 경북사람들의 항일투쟁이 유난히 강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그의 말이 소개되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시집온 김락은 시아버지 이만도가 의병장으로 나서고 시숙부와 남편이 거기에 동참하는 바람에 가슴 조이며 살았다. 1910년 나라 잃은 그 가을에 시아버지가 단식해 순절하는 동안 그 곁을 지켰다. 매일 눈물로 상을 차려 올리며 드시라 애원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았다. 어른은 굶어도 후손들은 먹어야 했다. 상복 자락에 눈물도 마르지 않은 그해 겨울, 큰 오빠와 친정 가족들, 큰 형부인 석주 이상룡과 그 가족들이 만주로 망명했다.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세워 군사를 기르겠다고 떠난 길이다.

남편 이중업은 1919년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를 처음 기획한 다섯 사람중 한 인물에 속한다. 그럴 무렵 김락은 예안장터에서 독립선언에 나섰다가 일제수비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끝에 두 눈을 잃었다. 1921년 남편 이중업이 제2차 장서를 갖고 중국으로 가려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앞도 못 보면서 남편을 이별한 것이다. 두 아들과 두 사위는 모두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동흠·종흠 형제가 그렇고, 금계마을 학봉종가의 종손이자 맏사위인 김용환이 그랬다.

독립운동가라면 으레 남성이요, 여성이라면 신여성을 떠올린다. 그는 전통명가의 안주인이다. 시아버지, 남편, 그리고 아들에 이어지는 독립운동가 3대를 지켜나간, 스스로 항일투쟁에 앞장 선 전통여성의 장엄한 역사가 여기에 있다.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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