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지붕 위의 삶

나는 지금 역전 뒷골목에 위치한 판잣집 지붕 위에 있다. 하늘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만나보긴 처음이다. 비가 내리면 내 몸은 지붕보다 먼저 젖는다. 1년 전 태풍이 북상중이란 뉴스를 본 주인이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내 이름은 타이어다. 둥근 몸을 가졌고 달리는 일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내가 달리는 일에서 발을 떼고 지붕 위에 얹혀 있다는 건 굴욕이다. 닳고 닳더라도 최소한 이곳에만큼은 오고 싶지 않았다. 달리다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게 타이어란 이름을 가진 것들의 본성이다.

간혹 달리지도 않으면서 타이어란 이름으로 시중에 유통되는 것들이 있다. 대부분 장식품으로 만들어진 부류다. 우리 바퀴 세계에서는 그들을 우리와 같은 종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들은 달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생득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어야 타이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낡은 지붕은 바람이 불 때마다 위태롭게 울었다. 내지르는 소리가 산짐승의 울음소리 같다. 나는 슬레이트 지붕을 온몸으로 눌렀다. 지붕이 날아가면 내 몸도 같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지도 모른다. 가끔은 그렇게 해서라도 지붕에서 탈출하는 게 옳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문제는 이제 내 몸이 그런 무모한 일에 모험을 걸지 않는다는 거다. '폐'라는 수식어가 붙은 뒤부터 생긴 버릇이다.

막 출고되었을 때의 나는 세상에 겁나는 게 없었다. 완벽한 둥근 몸, 검고 탄력 있는 피부, 아름다운 문양의 근육, 자존감 하나로 살았다. 열심히 쉬지 않고 달렸다. 달릴 수 있는 몸이 자랑스러웠다.

언젠가부터 자꾸 몸에 힘이 빠졌다. 주인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나는 아픈 몸을 굴려 정비소로 갔다. 공기압이 빠진 내 몸을 찬찬히 살피던 정비사의 손에 못이 들려 있다. 그는 구멍난 내 몸을 치료하면서 말했다. "타이어를 교체할 때가 됐네요. 너무 닳았어요." 정비사의 마지막 말은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눈을 조금만 내리깔면 옆 건물의 옥상이 훤히 보인다. 오전 8시만 되면 그곳으로 출근하는 노인이 있다. 그는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스티로폼에 파를 심고 고추 모종을 하고 때로는 맨드라미 씨를 뿌린다. 그 일이 끝나면 나무의자에 앉거나 서 있다. 옥상 바닥으로 굽은 등이 길게 드리워진다. 무척 긴 하루다. 그도 나처럼 갈 곳이 지붕 위밖에 없는 모양이다.

임수진(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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