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제징용 눈물의 씨앗 사할린서 희망 피우다

러시아 한인들이 열어가는변화의 현장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 회원들이 러시아 사할린주 코르샤코프시 망향의 언덕에서 강제징용을 당한 뒤 고국 배를 기다리다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 회원들이 러시아 사할린주 코르샤코프시 망향의 언덕에서 강제징용을 당한 뒤 고국 배를 기다리다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1990년 한인 최초로 사재를 털어 설립한 사립종합대학(유즈노사할린스크 경제법률대학) 학생들이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 회원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1990년 한인 최초로 사재를 털어 설립한 사립종합대학(유즈노사할린스크 경제법률대학) 학생들이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 회원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백발이 된 사할린 강제징용 동포 2세들을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원들이 업고 포즈를 취했다.
백발이 된 사할린 강제징용 동포 2세들을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원들이 업고 포즈를 취했다.

이달 4일 오전 러시아 사할린주 제1의 항구도시인 코르샤코프시 망향의 언덕. 언덕 앞으로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원색의 파란 하늘에는 이따금 갈매기가 오갔고 '피잉'하며 휘파람을 불어대는 바람이 거셌다. 언덕 중앙에는 10m 높이의 파이프형 배가 우뚝 서 금방이라도 바다로 달려나갈 듯 망망대해를 굽어보고 있었다.

이곳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강제 징용을 당한 동포 4만여 명의 한이 서린 곳이다. 해방이 된 뒤 사할린 방방곡곡에서 동포들이 고국 땅을 다시 밟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몇 달이 훌쩍 지나도 끝내 배는 오지 않았다. 일본은 더 이상 이른바 '황국신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을 저버렸다. 독립한 고국도 누구 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동포들은 망향의 언덕에서 수평선 위로 돛대를 휘날리며 자신들을 고향땅으로 실어갈 배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미쳐 죽었다.

65년 전 '절망'으로 점철됐던 사할린.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눈물의 땅이 아닌 희망의 땅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할린 곳곳에서 아리랑과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한 많은 역사의 단절을 끊는 파이프 배가 하나 둘 닻을 올리고 있었다.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 온 한인들은 러시아에서 한인 최초로 사재를 털어 사립종합대학(유즈노사할린스크 경제법률대학)을 설립하고, 또 사할린 제1의 도시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최초로 아파트를 지을 만큼 사할린을 새롭게 개척하고 있다.

민간외교 활동도 활발하다. 경북대와 영남대 국악과를 각각 졸업한 고정숙(29·여·판소리)·이은경(29·여·가야금) 씨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 근무의 하나로 사할린의 방방곡곡을 누비며 한국의 소리와 전통을 들려주고 있다.

고 씨는 "하루에 6시간씩 버스를 타고 오지를 찾아 공연을 하는 등 몸은 힘들지만 우리 문화를 가깝게 전파할 수 있어 보람차다"고 말했다.

동포 2세 서희자(65) 할머니는 "1988년 한국이 올림픽을 열었는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러시아인도 많고 아리랑도 곧잘 들을 수 있다"며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대구의 민간외교 역할도 현지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1994년부터 사할린과 교류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이하 대구청년민통)의 활동은 사할린 동포들이 해마다 가장 환영하는 단체로 입지를 굳혔다.

지난달 30일 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는 2천여 명의 동포와 러시아인이 모였다. 사할린 경제법률 정보종합대학(YUSIEPI)과 대구 비전포럼이 주최하고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가 주관한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 대구의 밤 축하페스티벌 &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성공기원' 행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센터를 가득 채운 파란눈의 외국인들은 대구에서 온 이방인(?)들을 진심으로 반겼다. 무대에 엉겨 아리랑을 불렀고 한국 문화에 대해 이해를 높였다. 동포들도 대구에서 날아온 청년들의 정성에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사할린은 '강제 징용'당한 동포들이 많아 매년 한국에서 수십 개의 단체가 찾고 있다. 그러나 대구청년민통처럼 장기간 명맥을 잇고 있는 단체가 없다시피 하고 일부 단체는 일방적으로 전시성 행사를 가져 현지인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실정이다.

대구청년민통은 매년 사할린 동포와 러시아인 10여 명을 대구로 초정해 일주일가량 시간을 함께 보내고 다시 사할린을 찾는다. 매년 장학금과 태극기, 격려금 등 푸짐한 선물 보따리도 풀고 있다.

하태균 회장은 "많은 단체들이 반짝 행사에 그치고 있지만 대구는 십수 년째 사할린 교류 행사를 펼쳐오고 있다"며 "진정성을 갖고 사할린 동포를 찾고 이들과 교류하는 것만이 인식의 간극을 좁히고 양국 관계에도 기여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사할린에서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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