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19일 오후 8시 필봉농악 대구지회 연습실(대구 중구 동인3가). 20여 명의 사람이 바닥에 앉아 장구와 꽹과리를 잡고 있었다. 이날은 풍물 무료 강습회 첫날. 수강생 모두 진지한 눈빛으로 필봉농악 대구지회 손영동 지회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초반에는 장구와 꽹과리의 소리가 다소 엇박자로 났지만 어느새 박자가 맞춰지기 시작한다. 일부 수강생들은 신명이 나 자연스레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4박자의 단순한 리듬 덕분에 수강생들은 금세 풍물패가 된 듯 즐거워하고 있었다. 손 지회장은 "2007년 처음 시작할 때는 10명도 채 모으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정규 회원만 30명이 넘는다"며 "40대 전후의 직장인들이 수강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7080 세대'인 40, 50대 남성들이 최근 직장인들의 악기 연주 배우기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문화센터나 인터넷 동호회 등으로 악기 연주 배우기가 대중화되면서 악기를 연주하려는 중년 남성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청년 시절의 문화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생적 문화 욕구가 커져 악기 연주 배우기에 나서고 있고 일정 수준의 실력을 쌓게 되면 관객 앞에서 공연을 펼치는 '문화 생산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봉농악을 체험하러 온 이태섭(51·대구 북구 태전동) 씨는 "나이가 드니까 정겨운 우리 가락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때 음악을 전혀 모르던 그는 대금을 1년 정도 배우면서 국악에 눈을 떴다. 이 씨는 "장구 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지만 재밌고 흥겹다"며 "국악을 배우면서 정신적으로 여유를 많이 가지게 됐다"고 했다.
악기를 연주하려는 40, 50대 직장인들은 국악뿐 아니라 다른 다양한 악기 연주 동호회에도 발걸음을 하고 있다. '오카리나클럽 대구모임' 운영자 중 한 명인 장영철(36) 씨는 "최근 들어 회원들의 연령대가 무척 다양해졌다. 과거에는 20, 30대가 주축이었다면 지금은 40, 50대가 많아졌다"고 했다. '플룻사랑 대구경북'의 운영자 김범수(32) 씨는 "어렸을 때 악기를 배우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돼 미뤄두었다가 중년이 돼 어느 정도 경제력이 생기고 자녀도 자라면서 악기 배우기에 뛰어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40, 50대 직장인들의 악기 연주 배우기 열풍의 특징은 대체로 배우기 어렵지 않은 악기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 대구종합악기 윤귀혁 사장은 "한 달에 10여 개 정도 판매되는데 40대 이후 고객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주로 배우기가 쉬운 색소폰이나 플루트, 클라리넷 등 관악기를 주로 찾는다"고 했다.
악기 연주 배우기는 배우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최근 동호회를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공연을 펼치는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많다. 동호회 회원들과 1년에 몇 차례 플루트 공연을 한다는 이정기(42·대구 수성구 범어동) 씨는 "공연을 통해 평소 잊고 지냈던 제 자신을 찾는 것 같고 힘든 사회생활로 잊었던 자신감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풍물을 3개월 정도 배운 직장인 고풍도(30·대구 동구 신천동) 씨는 "전국농악대회 등에 참가해 회원들과 공연을 함께 펼쳤는데 전에 느껴보지 못한 짜릿함을 느꼈다"고 했다. 악기 연주 배우는 것이 자기 만족에만 그치지 않고 공연으로 이어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 실력을 보여주고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며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이 동호인들의 설명이다. 요즘 웬만한 악기 연주 동호회에서는 이를 반영해 독자적인 연주회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같은 아마추어 공연이 활성화된 데는 동호회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진 것이 크게 작용했다. 김범수 씨는 "요즘은 문화센터 등에서 악기 강좌가 많다 보니 그곳에서 기본 과정을 배우고 난 뒤 동호회에 가입하는 이들이 많고 동호회 또한 여러 해가 지나면서 전문가들과 교류 등을 통해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가톨릭대 언론광고학과 박근서 교수는 "아마추어 공연이 활성화되는 것은 최근 소비자들이 생산적인 지위를 획득해나가는 흐름의 한 축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TV에서 아이돌 그룹들의 포장된 음악에 싫증을 느낀 면도 있다. 단순히 관람하는 문화에서 함께 생산하는 문화로 바뀌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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