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이기려면 먼저 알아야 한다

바둑 고수들의 행마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돌 하나하나가 그냥 두어지는 게 없다. 저마다 의미와 뜻이 담겨 있다. 이쪽을 노리며 저쪽을 건드리기도 하고 축머리를 만들려고 난데없는 곳을 겨냥한다. 상대의 의중을 떠보는 돌도 있고 팻감을 만드는 사전 공작도 벌인다. 의미가 없거나 상대로부터 외면받는 돌은 곧바로 패착이 된다. 상대 행마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게 승리의 비결이다. 수를 읽는다는 말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검찰 수사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화, 태광그룹에서부터 C&그룹의 비리 혐의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를 잡겠다며 나서고 국회의원들의 각종 비리 혐의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과 총장 내정자의 낙마로 숨죽이고 웅크렸던 검찰이 사정의 칼날을 고쳐 잡은 모양새다. 검찰이 바빠질수록 칼날의 향방을 살피는 눈과 귀도 바빠진다.

검찰의 동시다발적 수사에 대해 정'관'재계 주변에서는 집권 후반기 정권의 군기 잡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디서 어떤 수사가 진행될지 가늠하기 힘든 전방위 사정의 성격상 그럴 소지가 다분하다는 분석이다. 물론 검찰은 비리에 대한 검찰 본연의 역할을 할 뿐이라며 세간의 분석을 일축한다. 그러나 웬만한 사람들은 대기업과 정권 실세, 국회의원에 대한 전방위 수사라면 당연히 권력 핵심부와 일정 부분 교감을 가졌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최근 검찰의 청원경찰법 개정 관련 로비 의혹 사건 수사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청원경찰들의 처우 개선을 요지로 하는 법 개정과 관련 국회의원들이 돈 로비를 받은 혐의가 있다는 사건이다. 검찰의 수사에 정치권이 시끄럽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후원금 10만 원 받은 것까지 범죄시하는 것은 국회의원을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니냐'며 '집권 여당 대표로서 검찰에 경고한다'고 했다가 뒤늦게 한발을 빼기도 했다. 정치적 이해관계로 검찰 수사를 분석하며 압박하는 게 옳지 않다는 지적 때문이다.

입법 과정에 관여한 국회의원들은 억울하다고 한다. 소액 후원금을 누가 냈는지 일일이 확인하기가 쉽지 않고 법 개정은 의원의 정당한 입법 활동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청원경찰이 힘 있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아니란 사실은 국회의원의 항변에 설득력을 보태준다. 정치 후원금을 뇌물과 같이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검찰의 수사가 무리수는 아니다. 검찰로서야 당연히 들춰봐야 한다. 돈이 오가고 그 결과 법이 만들어졌다면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법 개정에 돈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밝혀 볼 부분이 있다. 국회의원의 임무는 국민의 삶을 제한하고 보호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다. 법을 만들며 돈을 받고 이익을 얻었다면 이는 대충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법을 만들려면 사정을 알아야 하고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국회의원이 만나지 못할 사람은 없으며 들어보고 살펴봐서 문제가 있다면 고쳐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다 보면 밥도 먹고 술도 마신다. 돈이 오갈 수도 있다. 국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아예 상주하다시피 하는 기관 단체 사람들도 적잖다. 입법 활동 과정에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자와의 접촉을 어느 선까지 용인할 것이냐는 문제는 이번 기회에 따져볼 필요가 있다.

비리냐 아니냐는 결론을 놓고 검찰과 정치권은 열심히 다퉈야 한다. 검찰의 수사도 당연하고 정치인의 항변도 틀리지 않기에 쉽게 결론 낼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최종 결론은 역시 유권자의 몫이다. 내가 선택한 국회의원이 어떤 법을 만들었는지, 그 법을 만든 의미가 뭔지를 살펴야 한다. 국회의원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다면 유권자는 늘 패자일 뿐이다. 우리 정치를 한 단계 성숙시키고 유권자가 진정한 승자가 되려면 스포츠를 즐기듯 정치를 즐겨야 한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의 의미를 헤아리는 관찰력이 정치 관전에도 필요하다. 그럴듯한 말에 속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徐泳瓘(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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