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근대미술의 향기] 김수명 '풍경화'

농사일로 분주한 가을 들녘 한 폭의 산수화 같은 풍경화

김수명, 풍경, 종이에 수채, 46×59.5㎝, 1943
김수명, 풍경, 종이에 수채, 46×59.5㎝, 1943

지금은 가을걷이가 끝나고 텅 빈 들이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나 예전이라면 이 그림 속의 풍경에서처럼 다시 흙을 고르고 고랑을 내는 손길들로 바쁠 때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이즈음이 또 내년에 거둘 보리 파종의 적기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농촌 일손을 돕기 위해 단체로 나온 학생들인지 모두 재색 반바지에 흰 상의를 같이 입은 무리들이 질서 있게 일하는 모습이 목격된다. 아직 남은 벼논 일부를 배경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각각의 동작들을 포착한 것이 이채롭다.

넓은 공간감과 원근감, 거기에 투명한 대기의 표현은 화창한 가을 날씨의 따가운 햇살이 금방 피부에 와 닿을 듯하고 들녘 저 끝 강변의 금빛 모래사장이 푸른 하늘과 함께 눈부시게 맑다. 가까이 키 큰 포플러나 산자락을 감아 돌아간 신작로의 가로수는 노랗게 물든 단풍으로 곱다. 채색이 담백하고 고상해 과도한 표현이나 묘사를 자제한 화가의 품성이 돋보이는데 김수명의 1943년 작 수채화다.

한 획으로 휘익 그어나간 샛강의 물길 묘사는 필선의 농담에서부터 휘어져 절묘한 삐침에서 끝나는 모양새까지 틀림없는 달필의 붓맛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표현이다. 산세의 음영 또한 주름 모양의 수묵준법을 적용한 듯 보이고 한두 획으로 처리한 인물들의 형상 역시 그렇다. 붓놀림이 간결하면서도 묘파의 정확성이나 단아함이 보면 볼수록 수묵산수화의 필획 같다는 느낌이다.

이상의 정치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앞부분의 밭고랑들은 흰 물감으로 죽죽 그은 굵은 선들로 대충 나타내 이 경치의 핵심을 현장에서 곧바로 포착해내는 작가의 속도감 있는 필세를 강조한다. 마치 김홍도의 산수화에서나 느낄 만한 흥취를 근대 작품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감상하는 듯하다. 이렇게 전통 서화와 서양화의 요소들이 어우러져 빚어낸 독자적인 경지를 좀 더 심화시키고 좀 더 멀리까지 개척해 가봤더라면 우리 근대 미술이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장에서 받은 인상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는 이런 작품은 감흥을 직접적으로 환기시키는 데 유리한 수채화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보여준 것이며 작가가 농촌 지역에서 교직생활을 했기에 가능했다. 일제강점기 말에 농촌에서의 집단 노동 모습을 풍경화에 담은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주제는 배경의 멋진 산수를 드러내는 쪽에 더 가 있으며 김천에서 가까운 낙동강변 어디쯤이지 않았을까 싶다.

김영동(미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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