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수상작 전문
회사에 출근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저는 적응을 못했습니다. 공장 일이라는 것이 육체적으로도 힘든 일이었지만 저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어요. 제가 중국 사람이라고 얘기했더니 직장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와 남편 나이가 몇이냐, 왜 여기에 왔느냐, 남편이 친정에 얼마를 주고 왔느냐 등을 계속 물어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궁금해서 물어보겠지만 한국에 온 것이 죄도 아닌데 무슨 동물 구경하듯이 중국에 있을 때에는 얼마나 못 살았었는지, 지금 한국에 오니까 놀랄 것이 많은지, 신랑은 농촌 총각인지를 물어보는 것이 저에게는 상처였습니다. 점차 친해지면서 하나씩 물어보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새로운 회사에 다시 취직을 했지요. 회사에서 처음 친하게 된 동료가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저도 모르게 '김천'이라고 거짓말을 해버렸어요. 그 순간 얼굴이 후끈후끈해졌습니다. 남편이 비록 나이가 많고 대기업 직원도 아니고 큰 아파트에 살지 않아도 저는 제 삶에 만족하고 행복했어요. 그런데도 저는 거짓말을 해버린 거예요.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제 삶이 부끄럽고 당당하지 못하다는 말이잖아요. 저는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고 이럴 수밖에 없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부정한 그 날 이후로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서 내가 내 실력으로 당당하게 들어간 좋은 직장에 다니며 당당하고 자신 있게 살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중국에서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저에게 공부는 평생소원이었고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또한 너무나도 긴 여정이었습니다. 비록 조선족이라 한국어를 힘들지 않게 쓸 수는 있지만 한국에서 공부라니요. 영어, 수학, 한국 역사, 그런 것들을 제가 인제 와서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한국말로. 그러나 누구도 제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제 간절함을 이해한 남편은 제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남편의 손을 붙잡고 꼭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당당해지겠다고 맹세했어요.
저는 바로 그 다음날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학원 등록을 하고 온 날 저는 동네에 자주 가는 미용실에 가서 자랑했어요. "언니, 저 검정고시 공부하려고 해요." 그러자 그 언니는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그 어려운 공부를 뭐하려고. 한국 사람도 어려워 하는데 중국 사람은 더 힘들지. 그냥 애기나 잘 키워. 인제 와서 무슨 공부를 한다고 그래. 남편 애 먹이지 말고 그만둬."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나왔어요. 집에 들어가자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 언니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생각할수록 분하고 속상했어요. 나는 남편 애먹이려고 공부하려는 것이 아닌데, 남편과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는 건데, 딸아이에게 더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려고 하는 건데, 왜 사람들은 할 수 없다고, 왜 불가능하다고 할까, 내가 하는 걸 보지도 않고 왜 포기하라고 할까.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이 일을 꼭 해내리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리라! 아이를 붙잡고 울면서 다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단 단기 목표를 세워 하나씩 달성하고 또 다른 큰 목표를 세울 것을 결심했습니다. 당장은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전문대학에 가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학원에 등록한 다음날부터 바로 수업에 들어갔어요. 내년에 대학에 가려면 이번 4월에 시험에 합격하고 8월에도 합격해야 했습니다. 6개월 만에 고입 검정고시, 4개월 만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막막했어요. 그러나 막막하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자. 그리고 결과에 만족하자." 생각하고 시간표를 짰어요.
하루 4교시 수업을 열심히 듣고, 매 수업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이 차 마시면서 쉬는 동안 복습하고, 오후에는 집 근처 도서관에서 3시간 동안 공부하고,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저도 집으로 와서 아이와 놀면서도 책보고, 아이를 업어 재울 때도 책을 봤습니다.
주말에는 남편이 집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어요. 남편은 주말에도 쉬지 못한다고 힘들어했지만 더 열심히 하라고 응원을 보내주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 딸이었습니다. 딸아이는 갑자기 엄마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많이 울고 많이 보챘습니다. 길어진 어린이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집 문을 나서 어린이집 차를 기다리는 동안 매일 울었어요. 그것도 몸부림을 치면서. 전 너무 속상하고 미안했습니다. 저렇게 가기 싫어하면 안 보낼 수도 있는데 내가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저렇게까지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를 떼어놓아야 하다니···. 하지만 남편은 회사를 가야하고, 저는 학원에 가야했으므로 울어도 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아이를 보내며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민경아, 엄마 빨리 시험에 합격해서 당당하고 멋진 엄마 될게.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려줘. 미안해 민경아."
아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울며 두 달 넘게 어린이집을 다녔습니다. 선생님도 이렇게 오래 우는 아이는 처음이라고 말했어요. 아이 역시 나와 함께 힘들고 긴 터널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혹시 어린이집이 안 맞아서 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시험이 코앞인 지금 다른 어린이집을 찾아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저 아이를 달래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아이가 유난히 자지 않고 보챘던 어느 날, 아이가 뜨끈뜨끈해서 열을 재 보니 열이 39℃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놀란 저와 남편은 응급실로 아이를 업고 뛰었습니다. 뛰면서, 내 욕심 때문에 이 어린 것이 얼마나 괴로움을 겪고 있나 생각하니 가슴이 찢기는 것 같았습니다. 공부한다고 어린이집에 버려둔 우리 딸, 아파도 말도 못하고 혼자 앓고 있었던 우리 딸, 남편도 제가 원망스러웠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후두염이라고 약을 처방해 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몸에 기운이 다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습니다. "여보, 공부는 민경이 좀 더 큰 뒤에 하면 안 될까." 저는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절벽에 혼자 서 있는 막막한 기분으로, 약을 먹고 기운이 없어 잠만 자는 아이를 쓰다듬었습니다. 그 후로도 아이는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 열이 났고 저는 아픈 아이를 대신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며 그 시간을 보냈습니다. 일주일이 일 년 같이 느껴졌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 생긋 웃으며 다시 예전의 예쁜 딸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린이집 차를 아이와 함께 기다렸습니다. 어린이집 차가 나타나자 아이는 좀 칭얼대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몸부림치며 울지 않고 선생님을 반가워하며 차에 올라타는 것이 아닙니까! 아이는 "엄마 안녕~" 하며 차창 밖으로 손까지 흔들었습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이를 태운 어린이집 버스를 오래오래 바라보며 각오했습니다. 반드시, 꼭 시험에 합격해서 이 서러움을 다 날려 보내리라!
저는 학원으로 달려가 빠진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공부했습니다. 한 동안 빠졌더니 따라가기는 힘들었지만 옆 사람의 노트를 빌려서 빠진 것도 적어 넣고 책을 빌려 요점 정리도 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벌써 시험 날이 다가왔어요. 시험장에서는 너무나 떨렸지만 밖에서 응원해주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그리고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남편은 대견하다고 칭찬해주면서 이제는 좀 쉬라고 했지만 저는 딱 하루만 쉬고 대입 검정고시 학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번에는 더 열심히 했습니다. 몸에 있는 모든 기운을 다 빼내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느낌이었지만 당당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간절함과 훌륭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열망과 대학에 가고 싶다는 욕심이 나를 달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시험 날, 그 길고 긴 시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정답을 확인했습니다. 합격이었어요. 그 기쁨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면, 10억짜리 로또에 붙으면 저보다 더 기쁠까요? 설마요. 저는 세상의 역경을 혼자 이겨낸 것 같은 벅찬 기쁨에 남편을 붙잡고, 아이를 붙잡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 눈물은 이제까지 제가 흘렸던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었어요. 저에게, 중국에서도 못 이룬 꿈을 한국에서 이룬 저에게 주는 고마움의 눈물이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려면 아마 더 힘든 일들이 닥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주 여성이라고 무시하고, 안 될 거라고 쉽게 말하는 한국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꿈을 이루어 가는 모습을. 저는 다른 이주 여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여기가 비록 고향은 아니지만 열심히만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기회를 주는 땅이라는 것을.
이제 울지 않을 겁니다. 저 큰 세상을 향해 저는 당당하게 걸어나갈 것입니다.
이효염 경상북도 구미시 구평동
◆이효염씨 수상소감 "남편에 너무 감사…상금은 대학 등록금으로"
'2010 전국 다문화가족 생활체험 수기 공모' 대상 수상자 이효염 씨는 "대상 당선 연락을 받았을 때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었는데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녀는 "한국에 와서 힘든 일도 많았고, 기쁜 일도 많았지만 이번 수기 당선으로 세상을 다 얻은 듯 하다"며 "내가 대상을 받을 자격이 되는지, 응모한 다른 분들께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효염 씨는 한국은 교육수준이 굉장히 높은 나라이고, 완전한 한국인으로 정착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왔다며, 어려운 조건에서도 공부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도와주고 밀어준 남편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현재 경북 구미에 살고 있는 이효염 씨는 구미1대학 비즈니스 외국어과 수시모집에 합격해 입학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번에 받은 상금을 등록금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조두진기자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