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집이 불타고… 겨울은 오고…" 안동 사붓골 이정기씨

올 봄 화재로 천막생활 78세 할머니가 품팔이 5명 자식도 형편어려워

안동의 산골 마을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몰려오자 이정기 할아버지가 이불을 두른 채 마당에서 새끼를 꼬며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안동의 산골 마을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몰려오자 이정기 할아버지가 이불을 두른 채 마당에서 새끼를 꼬며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안동시 갈라산 등산로 입구 사붓골 마을에 사는 이정기(80·안동시 남선면 도로리) 할아버지는 요즘 날씨가 추워지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지난봄 화재로 평생을 의지해 살던 집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천막생활을 하는 탓에 동장군이 엄습하는 게 걱정되기 때문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군불 불티가 그만 집에 옮겨 붙어 난리가 나고 말았지요. 허허 내 참." 그동안은 천막으로 대충 비를 가리고 지낼 수 있었지만 최근 기온이 뚝 떨어져 집안으로 냉기가 스며들면서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방 두 칸 부엌 한 칸 7평짜리 작고 볼품없는 오두막집이지만 이 할아버지한테는 한평생 산골마을에서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던 곳이었다. 태어나고 자라고 결혼해서 신방 차리고, 부모님을 정성껏 모신 것은 물론이고 자식들도 이 오두막에 의지해 다 키워냈다.

"집을 고쳐야 하는데 엄두가 나질 않네요." 온몸이 쑤시는 노환으로 거동조차 어렵기에 숯덩이가 된 집을 쳐다보면 눈물만 울컥 나온다. 게다가 한 달 살림살이가 고작 쌀 한 말에 의지해 사는 형편이니 더욱 그렇다. 모두 14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마을 주민들은 연세가 가장 높은 이 할아버지의 기막힌 처지를 기회 닿을 때마다 외부에 알렸지만 경기가 어려운 탓인지 지금까지 아무도 나서 주는 이가 없단다.

이 할아버지는 부인인 우분술(78) 할머니를 기다리는 게 하루 일과다. 요즘은 해가 짧아져 어둠이 내리는 저녁이 되어야만 일을 나간 할머니가 귀가한다. 이때가 하루 중 가장 기쁘다. 그러니 해가 지도록 혼자 마당을 서성거리며 할머니를 기다린다. 산골 노부부의 생계를 짊어진 할머니가 품팔이로 힘들게 일하는 것을 생각하면 방안에 누워 있기가 너무 미안하다는 게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온종일 혼자 남겨 둔 병든 할아버지가 걱정되기 때문에 할머니는 일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오두막집으로 돌아온다. 일 년 농사라고는 산비탈 밭 3천㎡에 남의 다락논 부치는 게 고작이다. 그러니 한 달에 1만5천원하는 전기료도 아끼고 산다.

"집사람이 없었으면 벌써 큰일났지요. 애들도 다 어려워서." 지난 추석 땐 자식들이 오두막집을 찾아 오지 못했다. 5남매가 서울, 부산, 대구로 나가 살고 있으나 다들 형편이 어려워서 되레 할아버지가 도와줘야 할 입장이란다. 불탄 집 처마엔 자식들에게 줄 마른 고추랑 콩, 팥이 담긴 봉지들이 매달려 있다.

아침 일찍 일을 나가는 할머니가 미리 차려 놓은 식은 점심을 혼자서 먹다 목이 멘 할아버지는 가족 모두가 의지해 기거하던 집이기에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했다. 이웃들도 집을 새로 지어 주고 싶지만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안동·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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