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8시 50분 대구시 남구 대명동 대구보건학교. 대학수학능력시험 제53 시험장인 이곳 3층 교실에서 희뿌연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모든 수험생이 시험을 끝내고 휴식을 취할 시간이지만 김기문(18) 군의 시험은 이날 오후 9시에 끝이 났다.
"수고했다." 교실 밖을 나서는 기문이를 아버지 김정환(53) 씨가 와락 끌어안았다. 부자의 대화는 짧았지만 감동은 길었다. 기문이는 앞을 보지 못한다. 시각장애 1급 수험생들은 일반 수험생보다 1.7배 더 긴 시험 시간을 갖는다. 기문이가 깜깜한 밤에 시험장을 나선 이유다.
기문이는 이날 눈 대신 손끝으로 점자가 새겨진 수능 시험지를 만지고 풀었다. 공부하는 과정은 더 고단했다. 점자 문제지를 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 김 씨는 "서점에는 고등학생 수험서가 즐비하지만 점자 문제지를 사려면 서울의 점자 전문 서점에 따로 주문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들은 한 달에 한 번 치르는 모의고사를 기문이는 고등학교 3년 동안 딱 일곱 번 치렀다. 기문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모의고사를 치르거나 연습할 기회가 자주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기문이는 천천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공부했다. 귀는 최고의 무기다. "못 보니까 듣는 거죠. 시각 장애인 전문 교육 사이트에서 인터넷 강의를 듣고 외웠어요." 끊임없이 기억하는 버릇은 공부할 때 큰 도움이 됐다. 모르는 성경 구절이 없을 만큼 성경을 줄줄 외던 기문이가 근현대사 과목에 가장 자신이 있다는 것도 이러한 습관 덕분이었다. 기문이는 세상과 귀로 소통했다. 또래 친구들은 농구와 축구 등 땀냄새 풍기는 운동을 하며 어울리지만 기문이는 그럴 수 없다. 음악을 사랑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라는 밴드가 가장 좋다"는 기문이는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며 세상과 만나고 고3 스트레스도 풀었다.
이날 쌍둥이 동생 기민(18) 군도 수능을 치렀다. 인큐베이터에 있었던 두 아들 중 기문이만 '미숙아 망막증'으로 시력을 잃었고 기민이는 앞을 볼 수 있다. 어머니 이윤경(53) 씨는 "기문이가 동생보다 몇 배 더 노력해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자 '내가 눈을 뜨고 있으면 동생만큼 잘할 수 있는데'라고 말할 땐 참 가슴이 아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도 동생은 기문이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일반 유치원을 2년간 다닐 수 있었던 것도 동생 기민이가 분신처럼 형을 지켜줬기 때문. 기민이는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보면 꼭 시험지를 가져와 형을 위해 읽어주고 설명해 줬다.
기문이는 인내하는 법을 아는 아이였다.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꼬박 14시간을 시험장에서 보냈으면서 인상을 쓰기는커녕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을 불편해할 뿐 불평하지 않았다. 기문이는 "장애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특수교육학과에 진학해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요. 내가 받았던 도움을 이제 되돌려주고 싶어요."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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