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물로 마음 채우기

며칠 전, 출근길 도로 곳곳에 각 학교 총동창회에서 송년의 밤을 연다는 플래카드들을 보았다. '연말이구나' 싶었다. 20주년 혹은 30주년 은사의 밤이 열린다는 문구를 보면서 잠깐 여고 시절 선생님과 친구들 생각에 출근길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차가 밀려도 좋다는 간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좋아했던 선생님도 왜 그리 많았는지, 내 입가에는 옛 추억으로 인한 미소가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최근 필자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곤 한다. 여기저기서 송년모임을 한다고 연락이 와도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다. 필자와 오랜 시간 함께 일했던 이들의 갑작스런 장례식에 다녀와서인지 뭔가 허전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갑자기 며칠 뒤 있을 송년 행사에 필요한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화도 나면서 '내 그릇에 물이 넘치고 있구나' 싶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 못한다는 생각,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걸 알면서도 뭔가에 쫓기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 그릇에 넘치는 물을 담을 예쁜 그릇을 또 하나 마련하기로 말이다. 돈 드는 일도 아니라 결정도 빨랐다. 이번엔 아예 큼지막한 아이로 장만해야겠다. 그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에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물은 항상 자신의 진로를 찾아 멈추는 일이 없다. 무척 대견스럽다. 물은 스스로 움직여 다른 것을 움직인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없다. 물은 장애를 만나도 물러서지 않는다. 물은 스스로 맑으려 하고 다른 것의 더러움을 씻어주며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다. 또 양양한 대해를 채우고 구름이 되면서 비가 되고 얼어서 영롱한 얼음이 된다. 하지만 그 본성을 잃지 않는다.

흔히 알고 있는 물의 가르침은 5가지다. 내가 힘들 때마다 새기고 또 새기는 말들이다. 인생을 물 흐르듯이 사는 게 좋다고들 하지 않는가. 고인 물이 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 흐를 수 있도록 지금의 자신보다 더 새롭고 발전된 모습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단순해 보이긴 하지만 물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하기에 되새길 수 있어 좋다. 생수 한컵 마시면서도, 손을 씻으면서도, 아침 출근길 신천을 보면서도 한 번만 더 생각하자.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말이다.

김건이<패션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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