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대구시의회 앞에선 소규모 집회가 열렸다. 안건은 대구시교육청이 시의회에 제출한 고교 기숙사 건립 예산 276억원(시예산 60억원 포함)의 전액 삭감. 집회 주최 측에선 차라리 그 돈을 무상 급식 확대에 쓰라고 요구했다. 극소수 학생을 위한 '전시 행정'이라는 것. 기숙사 건립 예산안은 이날 시 교육위원회를 통과, 다음 달 중순 본회의 의결을 기다리고 있다.
고교 기숙사가 최근 대구 교육계 '화두'로 떠올랐다. 우동기 시 교육감이 내년에 8~10개 고교에 기숙사를 짓겠다며 시의회에 예산안을 낸 게 발단이 됐다. 고교 기숙사 건립은 우 교육감의 공약이다. 고교 기숙사, 어떻게 봐야 할까. 대구 유일의 기숙형 공립고인 포산고(달성군 현풍면)를 둘러보고, 고교 기숙사에 대한 각계 의견을 들어본다.
◆기숙사가 학교를 살렸다, 포산고
이달 1일 대구 도심에서 승용차로 40여 분을 달려 도착한 포산고. 경남 창녕군과 4, 5분 거리인 대구의 최남단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주변의 전원 풍경과는 너무나 달랐다. 교정에 들어서자 깔끔하게 단장된 잔디 운동장과 현대적인 교사(校舍)가 한눈에 들어왔다. 두 동의 기숙사 건물은 5층 증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올해 우리학교 1학년 입학 커트라인이 1.4%였습니다. 3, 4년 전만 해도 폐교를 걱정해야 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꼴찌 학교를 우수학생이 몰려드는 명문학교로 끌어올린 것은 바로 기숙사였습니다."
포산고의 전신은 현풍여고다. 2002년 공학으로 전환하면서 현풍의 옛 지명인 '포산'을 따 현재 교명을 지었다. 공학 전환은 위기였다. 현풍의 여중생들이 인근 사립고로 빠져나갔다. 몇 년 만에 3개 학급이 2개로 줄었고 성적은 대구 최하위를 맴돌았다. 조관호 교무부장 교사는 "당시 입학생 성적이 중학교 내신 70%부터 100%까지 이르렀다. 현풍 사람들도 아이들을 보내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도약의 기회는 2007년 찾아왔다.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농산어촌 우수고로 지정된 것. 같은 해 김호경 현 교장이 공모 교장으로 부임했고 이듬해 기숙형 공립고로 선정되면서 기숙사 건축 계획이 확정됐다. 2009년 3월 20억원짜리 기숙사가 문을 열었고, 그해 포산고는 한마디로 '대박'을 터뜨렸다. 현풍 이외 지역에서 뽑은 70%의 대구 시내 신입생(현 고2·117명)의 커트라인이 내신 5%를 그었다. 올해 신입생(105명) 선발에선 더 큰 대박을 쳤다. 상위권 학생들이 대거 몰리면서 커트라인 평균이 1.4%로 치솟았다. 올 3월에는 두 번째 기숙사 동이 들어섰다. 김 교장은 "기숙사와 우수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으니 믿고 아이들을 맡겨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포산고의 성공 키워드는 기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변에 시가지는 고사하고 논밭뿐이다. 학원들에 둘러싸인 도심 학교와는 별천지의 풍경이다. 그런 포산고가 기숙사 학교를 찾아 역외로 빠져나가는 학생·학부모들을 돌려세웠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심야 학원을 가던 학생들,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운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김 교장은 "단지 기숙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숙형 공립고만이 가능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곳 학생들은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인근 지역 학생들을 제외한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 저녁식사를 마친 오후 7~9시 심화형 수업인 에이스(ACE) 강좌가 열리고, 토·일요일에도 과목별 심화 수업이 이어진다. 기숙사 1층 개인 독서실은 자정을 넘어서도 쉽게 불이 꺼지지 않는다. 공립고의 특성상 교사가 바뀌어도 쉽게 학력 관리가 되도록 '성적 조회 시스템'을 갖췄다. 공동생활에서 오는 학생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인성 교육과 체험·특강을 열고 있다. 그러면서도 수업료는 일반 고교와 비슷하다. 포산고에는 학부모들이라면 한 번쯤 피부로 느꼈을 법한 '공립고 기피 현상'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 성과 덕분에 포산고는 지난해 4월 교과부로부터 '기숙형고교 모델학교'에 선정됐다. 김 교장은 "학원에 의존하지 않는 공교육만으로도 얼마든지 학력 신장이 가능하고 학생·학부모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며 "고교 기숙사는 대구의 교육력을 전반적으로 높일 수 있는 대책"이라고 확신했다.
◆고교 기숙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구시교육청은 내년 한 해 8~10개 고교에 기숙사를 지을 계획이다. 8개 자율형 공립고(대구·구암·상인·강동·호산·학남·달성·경북여고)가 우선 순위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시교육청은 향후 30개 고교 기숙사 완공이 목표. 지난 7월 대구 27개 공립고를 대상으로 선호도 조사를 했더니 19개교가 기숙사를 희망했다고 한다.
학부모들의 생각은 어떨까.
고1 딸을 수성구 학교에 보내고 있는 A씨. 그는 "고교 기숙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많은 학부모들이 집 팔고 전셋집을 얻어 수성구로 갑니다. 집 가까운 공립고에 아이를 맡기려니 너무 불안하니까요. 고교에 기숙사가 있다면 굳이 수성구로 몰릴 까닭이 없지 않을까요?" 고2 학부모 B씨는 "기숙사에선 야간 자율학습 이후 심화학습이 가능하니까 따로 학원에 아이를 보낼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반면 또 다른 고1 학부모 C씨는 "학력 향상이라는 명분으로 아이들의 개성, 가정과의 소중한 유대를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기숙사는 학력 향상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며칠 전 발표된 2010 국가학업성취도 평가의 고2 국어·영어·수학 전국 1위를 차지한 광주는 특히 학력 면에서 대구와 곧잘 비교된다. 초교에서 고교로 갈수록 학력이 나은 편인데, 이게 고교 기숙사 영향이라는 것이다. 광주의 경우 30개 사립고 대부분이, 또 15개 공립고 중 5개교가 기숙사를 갖추고 있다. 기숙사마다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 150명까지 수용하는데, 주로 고3 학생들이 대상이다. 광주는 전 공립고에 기숙사를 짓는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광주시교육청 김재근 장학관은 "기숙사가 광주지역의 고교 학력을 올린 여러 요소 중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 대입 수능 결과를 놓고 보면 그렇다"며 "기숙사 생활을 하면 학생들이 등·하교에 버리는 시간이 없다. 가정에서 학부모와 수험생 자녀가 서로 스트레스를 주고받을 일도 적다"고 했다.
앞서 말한 포산고의 사례를 대구의 다른 고교로 일반화시키기는 어렵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포산고는 한 학년 3개 학급, 100명가량인 소규모 학교다. 거의 전 학생 기숙사 입소가 가능하고, 기숙사 프로그램 운영이 용이하다. 반면 일반 고교에선 성적순으로 소수의 기숙사 학생을 선발할 수밖에 없고, 일반 학생과 교육 프로그램 운영에서 괴리가 생길 수 있다.
고교 기숙사가 바람직한 교육환경인가에 대한 단언도 어렵다. 실제 기숙사에 들어간 상당수 학생들이 '강압적인 통제가 심하다' '비위생적이다' '공부의 양만 강조한다'는 등의 불만을 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기숙사가 자칫 '성적 지상주의'를 만연시켜 고교 생활을 황폐화할 우려도 있다.
시교육청 박재흥 장학사는 "학부모들의 우려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공부는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기숙사에 못 들어가는 학생들은 없도록 할 것"이라며 "대구의 경우 특정 지역 고교에 학력이 편중되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여러 지역에 기숙형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효과적인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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