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운문서 화악까지] <50> 비슬 산남, 천왕산까지

깊은 산골 조피덤폭포 계곡, 일방통행 교통신호등 '깜박'

비슬 산남(山南) 첫 동네인 풍각면 화산리 원명마을 안에 설치된 교통신호등. 시간차를 두고 방향을 바꿔가며 일방통행 시킨다. 대도시서나 볼 수 있는 신호등이 심심 산골마을서 작동하는 모습이 매우 이채롭다.
비슬 산남(山南) 첫 동네인 풍각면 화산리 원명마을 안에 설치된 교통신호등. 시간차를 두고 방향을 바꿔가며 일방통행 시킨다. 대도시서나 볼 수 있는 신호등이 심심 산골마을서 작동하는 모습이 매우 이채롭다.

비슬산 '대문'(990m봉)을 통과해 산외(山外)공간으로 나서면 영 딴 세상이다. 무엇보다 산줄기부터 비슬기맥 본맥의 범주를 벗어나 그 '화악분맥'으로 바뀐다. 990m봉~천왕산(618m)~화악산(932m) 사이 25km를 니은(ㄴ)자 형태로 달리는 능선이다.

행정구역도 변해, 990m봉~천왕산 사이 15km 구간의 서편 및 남편은 대체로 경남 창녕군 성산면, 그 반대편은 경북 청도군 풍각면이다. 그 다음 천왕산~화악산 사이 10여km의 북편은 청도군 각남면, 남쪽은 밀양시 청도면으로 바뀐다. 앞의 것은 풍각-창녕 경계, 뒤의 것은 각남-밀양 경계인 것이다. 산줄기 위력이 새삼 실감되는 대목이다.

그 중 풍각-창녕 구간(990m봉~천왕산) 15km는 비티재를 경계로 다시 둘로 갈라 살필 수도 있다. 990m봉~비티재(278m) 사이 8.8km의 비슬산권과, 비티재~천왕산 사이 6.2km의 여타 산권(山圈)이 그로써 나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은 높이에서도 차가 져, 비슬산권에선 대체로 500m 이상의 고도를 유지하는 반면, 비티재 이후엔 대부분이 300m대를 맴돈다.

저 풍각-창녕 구간의 전체적 흐름은 990m봉~920m분기점~서낭단고개(400m)~난두산(611m)~마령재(405m)~수복산(593m)~비티재(278m)~방골재(296m)~묘봉산(514m)~퉁점이재(324m)~배고개(305m)~천왕산(618m) 순이다.

그 초입서 화악분맥은 920m분기점을 지나자마자 유례 드물게 직선까지 그리면서 급강하한다. 동쪽의 상수월마을(수월리)과 서쪽 원명마을(화산리) 사이를 헤집고 순식간에 500m나 폭락하는 것이다. 도달하는 해발 400m 저점은 등산객들에 의해 흔히 '원명고개'라 불리는 곳이다. 그러나 그 본명은 '서낭단(城隍壇)고개'로 확인됐다. 거기 선 노송 두 그루가 원명 당산(堂山)나무라 했다.

저 구간 서편의 원명(元明)은 마을 뒤를 가마봉 등 비슬산 남서외곽능선 최고 절경 구간이 둘러싼 아래로 '조피덤폭포' 계곡이 펼쳐지는 명승지다. 깊은 산골인데도 불구하고 교통신호등이 가동되는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가파른 산기슭이어서 길이 좁은데도 피서객이 많아 일방통행 시켜야 하기 때문인 모양이다.

위도나 고도가 원명과 비슷한 동편 상수월 마을선 전원주택 붐이 한창이다. 마을 하류에 농업용 '성곡호'가 건설된 걸 계기로 성곡리 우실마을이 농촌휴양 및 그린투어 공간으로 도약하면서 예술인 등 외지인 유입·방문이 늘어난 데 영향 받은 듯 했다.

올 여름 많은 강수량 덕분에 성곡호가 처음으로 물을 가득 채워 풍광이 더욱 좋아졌으며, 비슬산 등산로가 제대로 정비되면 찾는 이가 더 늘 것이라고 주민들은 기대했다. 일대는 성곡호 건설을 위한 발굴조사(2008년) 결과 가야계통 유물이 대량으로 쏟아졌던 곳이기도 하다.

서낭단고개 이후 화악분맥은 다시 높아져 '난두산'(611m)을 이루고 다음엔 '수복산'(593m)으로 솟는다. 난두산은 풍각 금곡리와 창녕 연당리를 가르는 산덩이다. 저걸 금곡리서는 특별한 명칭이 없다는 반면 창녕 쪽에서는 여러 마을서 공통되게 '난디산'이라고 명쾌히 지목했다. 난두나무가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는가 싶었다. 경상도서 흔히 '난디'로 통하는 난두는 '산초'라고도 불리며 열매로 식용유를 짠다. '초피'(제피)와 닮았지만 초피는 봄에 꽃이 피고 열매에 향이 강한 반면 난두는 가을에 꽃이 피고 향이 없는 게 차이라 했다.

그 다음 산덩이에 '수복산'(593m)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 정점 북편에 '수복덤'(552m)이 솟은 때문이라 했다. 일대서 보기 드문 저 벼랑바위 위에 앉으면 비슬산 남부능선은 물론 멀리 화왕산과 우포늪으로 펼쳐져 가는 창녕 땅이 훤히 조망된다. 간혹 '수봉산'으로도 표기되나 '수복산'이 맞는 이름일 것 같다.

화악분맥은 이 수복산을 지나면 비티재로 급락한다. 그리고는 천왕산에 이를 때까지 대부분 구간에서 야산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창녕 성산면 방리·가복리와 청도 풍각면 안산리·월봉리를 가른다. 월봉·안산·가복 세 마을 접점, '묘봉'마을 서편에 자리한 묘봉산이 그 도중 유일하게 높이 솟는 봉우리다.

저 노정에서 분맥은 방골재·퉁점이재·배고개 등으로 세 번 고도를 더욱 낮춘다. 산줄기 너머 이웃해 있는 마을들을 연결하는 재다. 그리고는 해발 305m의 마지막 배고개서 순식간에 300여m나 치달아 천왕산에 오른다. 너무 가팔라서 등산한다기보다는 돌격한다는 느낌까지 주는 구간이다.

저런 재들 중 비슬산~천왕산 구간서 특히 주목할 것은 비티재(278m) 방골재(296m) 마령재(405m) 셋이다. 단순히 마을과 마을을 잇는 재가 아니라 보다 광범한 지역과 지역을 이었거나 잇는 재이기 때문이다.

비티재는 청도(풍각)-창녕(성산)을 연결하는 20호선 국도 위의 고개다. 동쪽 길은 풍각으로만 연결되나, 서쪽에선 재 밑 '운봉천' 골 안 동네 방리서 다시 둘로 갈린다. 골 물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내려가다가 5호선 국도(마산~창녕~대구~안동)에 연결하거나, 골 남쪽을 가로막고 있는 큰 산줄기(태백지맥, 천왕산 지능선)를 하나 더 넘어 고암면·창녕읍을 향해 남서 방향으로 직진하는 것이다. 방리가 자동차교통에 요긴한 길목인 셈이다.

하지만 비티재는 그 이전 도보시대에는 통행인이 많지 않던 재라고 했다. 그 구간 화악분맥을 넘던 주목적은 서쪽의 창녕장·현풍장과 동쪽의 풍각장 생활권을 잇는 것이었으나 그런 일에는 그 좌우에 있는 방골재나 마령재가 훨씬 유용했다는 얘기다. 비티재가 지금같이 핵심 교통로로 부상한 것은 한국전쟁 이전에 거기로 신작로가 나고 차후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면서였다는 것이다.

옛 도보시대에 창녕읍과 풍각면을 잇던 길목은 창녕 방리의 '안마실'과 청도 안산리 '무태(안태)'마을 사이에 난 방골재였다고 했다. '무태재'라고도 불리는 이 재를 통해 풍각 사람들은 창녕장을 내왕하며 돼지·개 같은 가축의 새끼나 참깨·콩·고추 같은 양념거리를 샀고, 창녕 쪽에서는 이런저런 농산물을 이고 지고 풍각장에 팔러 다녔다는 것이다. 방골재 양편으로 지금도 선명히 나 있는 길은 그런 발길들의 흔적일 터이다.

어르신들에 따르면 그러나 일대서 통행량이 가장 많던 건 마령재였다. 남·북간으로는 난두산과 수복산의 중간에 있고, 동·서간으로는 창녕 연당리와 청도 금곡리 사이에 나 있다. 마치(馬峙) 말치 마령(馬嶺) 마령치 마랑재 등등 여러 이름으로 통한다. 거기서 금곡리로 내려서는 골짜기 이름도 '말치골'인 걸 보면 말과 무슨 인연이 있는가 싶다. 풍각서 비티재로 향할 때 전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잘록이가 그 고갯길이다.

마령재의 많은 통행량은 그 양편에 매우 넓은 생활권역이 펼쳐져 있는데 기인했다. 서쪽엔 대합면·성산면 등 창녕 북부권과 유가면·구지면·현풍면 등 달성 남부권이 분포하고, 동편에는 풍각을 시작으로 청도의 넓은 땅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장날이면 서쪽 아주머니들은 동쪽에서 나는 고추 등등과 바꿔 가려고 땅콩 같은 그쪽 산물을 챙겨 줄을 이었고, 소들 또한 규모 큰 풍각 우시장을 드나드느라 숱하게 마령재를 넘었다.

금곡리 쪽에는 덩달아 저들을 대상으로 한 주막이 성업했으며, 소장수들은 거기 여러 개 박아둔 말뚝에 소를 매어놓고는 눈을 붙이고 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돼지새끼 팔고 돌아가다가 강도당한 이야기 등등 숱한 희비가 묻힌 곳 또한 마령재라는 것이다.

저런 교통상의 요충성 때문인지 풍각 쪽의 근래 큰 관심거리 중 하나는 마령재에 터널을 뚫는 일이었다. 청도군청에서 중앙정부에 공식 건의한 바도 있다는 그 터널이 뚫리고 연결로가 생긴다면 대구의 신산업 심장부로 성장 중인 현풍권과 청도가 동일생활권으로 급속히 묶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쪽 산줄기와 관련해 청도읍지인 '오산지'(鰲山志·1673)는 "비파산(琵琶山·비슬산)의 지맥이 남쪽으로 가서 마치협(馬峙峽)을 지난 뒤 굽이쳐 갑을령(甲乙嶺)이 됐다가는 동쪽으로 굽는다"고 적어뒀다. '마치협'과 '갑을령'을 특히 주목한 것이다. '마치협'은 바로 마령재고, '갑을령'은 '서쪽(갑을방향) 창녕 경계에 있는 것'이라고 각주된 걸로 봐 수복산 정도를 가리킨 것 아닌가 싶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9월엔 창녕·달성 쪽의 수많은 피란민들 또한 저 마령재를 넘었다. 남·북 방향 낙동강 물길을 지키던 미군방어선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피란민들은 저 재를 걸어 넘어서는 청도 풍각천과 청도천 등등 하천바닥에 움막을 치고는 인천상륙작전 때까지 버텼다.

패배한 미군부대는 자동차로 비티재를 넘어 후퇴한 뒤 비슬기맥에 다시 방어선을 구축했다. 마령재 초입의 금곡리 입구 마을 숲에 진을 치고는 수복산 위로 탱크를 올려 보내 비슬기맥을 오르내리며 새로 구축한 전선을 지킨 것이다. 그럴 때 비슬기맥 서편의 창녕 쪽 기슭은 모두 불태워졌고 동쪽 청도의 금곡마을 숲 거목들은 미군들이 놀이삼아 쏘아댄 권총에 맞아 모두 썩었다고 했다. 어려서 전쟁을 목격한 현지 어르신들은 줄줄이 재를 넘어오던 미군의 자동차 행렬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엔 한국군이 지키던 동·서 방향의 팔공기맥 전선도 동부에서 상당 구간 붕괴됐다. 영천·포항 등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비슬기맥을 넘어 청도의 산동지방 하천으로 피란했다. 당시 청도에는 무려 40만 명이나 되는 난민이 몰려들어 전국 각 도청 단위로 임시 행정소를 차릴 정도였으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피란민을 위로하러 금천면 지역을 찾아야 하기도 했었다.

아군이 한국전쟁 마지노선으로 설정했던 전선은 남북으로 이어진 낙동강 물길과 동서로 연결된 팔공기맥 산줄기를 왜관 지점에서 연결한 역기역자(ㄱ) 선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적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몇몇 곳에서 무너졌을 때, 정말 최후의 생명선으로서 나라를 지키고 피란민을 품어 안았던 것이 비슬기맥이고 그 화악분맥이었던 것이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