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봄은 수다스럽다. 핑크빛 수건을 머리에 이고 찜질방에 둘러앉은 여인들처럼 그렇게 수선스럽다. 나무들은 가지마다 붉고 흰 초롱불을 켜고 누가 봄이 오지 않았다할까봐 저 능선 이 계곡에도 산불이 난 듯 '와아와아!' 함성을 질러댄다. 봄이 오는 바닷가 길목에서 듣는 꽃의 함성은 낮에는 눈으로 듣고 밤에는 환청으로 듣는다. 그게 바로 마음으로 듣는 소리의 향연이다.
꽃은 외톨이로 홀로 피어 있어야 멋있는 꽃이 있고 수다 떠는 여인네들처럼 한데 어울려 있어야 돋보이는 꽃이 있다. 지리산 바래봉의 진달래 덤불, 그리고 소백산 능선과 한라산 선작지왓 일대의 철쭉 군락, 거제 지심도와 고창 선운사에 무리지어 핀 동백, 섬진강 매화와 인근 상위동의 산수유, 또 영덕 야산 발치 복숭아꽃이 핀 도화마을의 봄 풍경은 정말 장관이다.
봄 경치와 대작하듯 마주앉아 있으면 꽃은 참으로 낯 두껍다는 생각이 든다. 꽃의 유전자에는 부끄러움 대신에 뻔뻔스러움만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꽃은 식물의 얼굴이 아니라 생식기가 분명한데도 큰 꽃이나 작은 꽃이나 '고추와 잠지'를 바깥에 드러내 놓고 벌과 나비를 불러들인다. 자태만으로 모자라 향내까지 뿜는다.
꽃들의 성기 관리는 윗대부터 내려오는 전통도 문제려니와 주변 환경과 가정교육이 엉망인데 주원인이 있지 않나 싶다. 치마처럼 생긴 꽃잎 속에서 앙다물고 있어야 할 것들이 나이가 차면 모조리 밖으로 튀어나와 "날 안아가요."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있다. 꽃 세상은 섹스의 화신 돈 후안이 아니더라도 한두 생애 살아보고 싶은 정말 환락의 자유천지다.
동물들은 생식기만은 소중한 보물이란 인식 아래 털 속이나 갑각 속에 감춰두고 나름의 체통을 지킨다. 사람들이 얕보거나 인간의 눈에 보일락말락 하는 아주 작은 동물들까지도 '동식물'이란 서열의 우위성을 지키느라 그 값을 하고 있다. 동물은 멸치처럼 작아도 뼈대가 있는 집안 자손이지만 식물은 문어처럼 덩치는 커도 뼈대가 없기 때문에 항상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식물 중에서도 어떤 놈들은 바람에 제 몸을 아예 맡겨버리기도 하고 빗물에 의탁해 후손의 안위를 부탁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식물세계에는 성폭행을 저지르고 전자발찌를 차야 할 죄와 벌은 없고 다만 나비와 벌들 사이에 꽃만 있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감각의 박물학'을 쓴 다이앤 애커먼은 "나는 생식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져 볼만하고, 나의 생식 기관은 촉촉하게 젖어 있다"고 꽃의 심사를 대변해 주었을까.
'꽃에 관한 명상'이라 해도 좋을 이 단상은 지난 주말 남해의 바닷가를 한 바퀴 돌면서 느낀 바를 간추린 것이다. 이날 달리는 코스 중에는 남해 설흘산 밑 다랑이마을이 끼어 있었다. 이 마을에는 경남도 민속자료 13호인 가천 암수바위가 나란히 서 있었다. 마침 때는 춘삼월, 주변 야산에는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남성과 여성 성기를 닮은 바위 부부의 모습과 그들이 곧잘 저지를 것 같은 은밀한 행위가 내 의식 속에서 봄바람에 흩날리는 바람난 꽃으로 전이되어 이렇게 해괴망측한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다랑이마을을 구경하는 동안 온통 꽃의 유희에 사로잡혀 그 꽃밭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이드를 맡은 이가 "생선회 쳐놓은 지가 한 시간이 지났는데 모두 물건 구경한다고 정신이 없네"라는 말에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구문인협회 문학기행 버스가 출발할 때부터 "오늘 회는 도다리와 놀래미 그리고 농어 등 자연산으로만 주문했습니다"란 자랑이 만만치 않더니 정말 그랬다.
남해수협 활어중매인 16호인 선구횟집(김정일'055-862-8288)에서 준비한 식탁은 생선회뿐 아니라 반찬까지 남해의 명품들이어서 어느 것 하나 까탈스런 내 입맛을 벗어나는 게 없었다. '남해 꽃구경도 식후경'인가, 생선회를 먹는 동안에는 내 눈이 멀었는지 눈앞에 꽃잎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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