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딱한 대통령, 더 딱한 국민

'동네에서 제일 열심히 일하는 일꾼으로 이름 났고, 제법 돈도 벌지만, 워낙 물려받은 게 시원찮아서 항상 빠듯하게 살아가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웃에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해서 힘들게 꾸려가는 아버지가 딱하다고 동정합니다.'

지난 3월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발표 무렵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로부터 받은 문자메시지의 일부분이다. '대통령'이란 표현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아버지'는 이명박 대통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혔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이를 오해하거나 몰라주는 세태가 안타깝다는 토로였다.

몇 달이 지난 요즘, 이 문자메시지가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특히 '딱하다'는 부분에서 그렇다. 청와대 참모의 넋두리대로 대통령이야 자나 깨나 나라 걱정만 했다 하더라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측근들 때문에 공(功)은 흔적도 없고, 과(過)만 남게 생겼다.

아직 임기가 21개월이나 남았지만 이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차갑기 그지없다. 국정운영 지지도는 30%를 겨우 웃도는 수준이고, 20%대 추락도 시간 문제다. 4'27재보선에서 여당의 패배도 결코 무관치않다.

하지만 더 '딱한' 것은 우리 국민이다.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임기 말 권력형 비리'를 또다시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르겠지 믿었다가도 역시나 '나쁜 X'들이란 탄식만 내뱉는 게 지겹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강호의 고수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달 25일로 집권 4년차에 들어가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lame duck)은 차츰 가시화되고, 정치권의 이합집산 또한 수면 위로 떠오르고, 4'27 재보선 이후에는 여야 잠룡들의 권력 투쟁이 노골화될 것이라는 것쯤은 '안 봐도 비디오'이다." 지난 2월 본란에 썼던 글이 맞아들어가는 게 전혀 반갑지 않다. 통탄할 일이다.

사건 초기부터 권력형 게이트로 비화될 것이란 우려를 낳았던 부산저축은행 사태는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른바 '집권 4년차 증후군 공식'이다. 실제로 김영삼 정부의 한보 게이트, 김대중 정부의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게이트는 집권 4년차에 터졌다. 노무현'노태우 정부에서는 3년차에 러시아 유전'행담도 게이트, 수서지구 택지 특혜분양 사건이 잇따르면서 민심이 떠나기 시작했다.

이 정부 들어와서도 '4년차 증후군'은 예외없이 일어나고 있다. 올 초에는 함바 비리 연루 의혹으로 배건기 청와대 감찰팀장, 최영 강원랜드 사장, 장수만 방위사업청장이 차례로 옷을 벗었다. '현 정부 임기 중에 게이트는 없다'는 청와대의 자신감이 무색하기만 하다.

문제는 이번 사건이 '권력형 비리'의 끝이 아닐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다. 벌써 저축은행과 관련된 청와대 수석비서관 연루설, 검찰의 여권 인사 내사설까지 나오고 있다. 행여나 대통령과 가까운 친인척의 비리까지 터지면 '공정사회'에 대한 냉소는 분노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이다.

이 대통령은 올 초 신년 방송좌담회에서 "레임덕은 자연스럽다"며 "다만 공직자들이 임기 말이 되면 혹시 해이해질까 하는 것,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해이해져서 비리'유혹, 이런 것을 특별히 신경써야 될 점은 있다고 본다"고 했다. 저축은행 사태와 관련해서는 "성역 없는 조사와 엄중한 처벌"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이쯤 되면 몹시 궁금해진다. 대통령의 강력한 경고에도 임기 말이면 어김없이 공직 비리가 불거지는 게 대통령의 '인복 없음' 때문일까, 국민들의 '부덕의 소치'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무한한 소신과 약간의 계산'은커녕 '무한한 계산과 약간의 소신'으로 똘똘 뭉친 고위공직자의 모럴 해저드 때문일까. 레임덕을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이상헌(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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