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유등지 연꽃

연꽃 피는 소리를 들어 보셨는가. 동이 틀 때부터 햇살이 비치기 전, 그 잠시 사이에 연출되는 연꽃이 몸을 여는 소리를 들어 보셨는가. 옛 선비들은 연꽃들이 꽃잎을 펼치는 소리를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고 생각했다. 청개화성(聽開花聲)으로 표현하는 그 소리는 꽃잎에 맺힌 이슬이 듣는 이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떨어질 때 들리는 바로 그 소리다.

조선조 정조 때 다산 정약용은 초계문신(抄啓文臣)들을 주축으로 죽란시사(竹欄詩社)란 모임을 만들었다. 그 모임의 규칙은 살구꽃 필 때 새해 첫 모임을 갖는다. 복숭아꽃이 피면 봄을 보기 위해 만나고, 참외가 익으면 모여서 여름을 즐긴다. 날씨가 서늘해지면 서지(西池)에 핀 연꽃과 불어오는 바람에 너울너울 춤추는 연잎들의 춤사위를 보기 위해 또 만난다. 가을이 깊어져 국화가 피면 모이고, 큰 눈이 내리면 기별이 없어도 모두 만난다. 한 해가 기울 때쯤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면 마지막으로 모인다.

선비들이 모일 땐 붓과 벼루 그리고 안주를 지참해야 한다. 간단한 안부가 끝나면 술을 마시며 온갖 담소를 나누다가 시심이 일면 엎드려 시를 짓는다. 일 년의 일곱 번 정기 모임 중에 백미는 가을 연꽃 구경이다.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선 이른 새벽에 말을 달려 서대문 옆에 있는 연 밭의 못 둑에 모여야 한다. 이 서련지(西蓮池)에는 연꽃 필 때 들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선비들이 타고 들어갈 조각배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내성(乃聲'노 젓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살금살금 못 안으로 들어가면 국기봉보다 더 큰 붉은 연 봉오리들이 떠오르는 아침 해의 기운을 받아 여기저기에서 '부우욱'하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를 내며 꽃잎을 편다. 바야흐로 선비들은 연당의 연꽃소리 향연에 초대받은 귀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옛 선비들이 즐긴 풍류, 그 풍류의 극치다.

비정기 모임도 더러 열린다. 벼슬이 높아지면 축하하기 위해 만나고 누가 아들을 낳으면 생남주를 마시기 위해 모인다. 수령으로 나가는 이가 있으면 송별연을 열고 자제가 과거에 급제하면 그 집에서 잔치를 벌인다. 이렇게 모이다 보면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나는 셈이 된다. 그렇지만 요즘처럼 룸살롱에 모여 하급기관 간부들을 불러 값비싼 양주를 맛과 향도 맡지 않고 폭탄주를 마시듯 그렇게 하진 않았다. 선비들은 풍류가 자칫 점잔을 벗어나 난봉으로 기울지 않도록 분수를 지켰다. 그들의 체통을 지키는 수단이 대화와 시 짓기였다.

연은 '매란국죽'이란 이른바 사군자 속에 끼지는 않지만 옛 선비들은 군자의 표상을 들먹일 때마다 곧잘 연을 들이대곤 했다. 연꽃을 좋아했던 중국의 주렴계(周濂溪)는 '애련설'(愛蓮說)을 쓰면서 연꽃의 특징을 군자의 성품에 비유했다. "진흙에 나서 물들지 않고(出泥而不染), 맑은 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고(濯淸漣而不妖), 가운데는 통하고 밖은 곧으며(中通外直), 넝쿨도 없고 가지도 없으며(不蔓不枝), 향은 멀리 가면서 더욱 맑아진다(香遠益淸)." 죽란시사 선비들이 해마다 이른 새벽에 서지의 연 밭으로 말 달려 간 것도 연의 기상을 배우기 위함이다.

연향은 연 밭 옆에 간다고 쉽게 맡아지는 게 아니다. 연꽃 향기는 바람의 골을 따라 흐른다. 연향이 흘러가는 길목에 앉아 1시간쯤 꽃향기를 맡고 나면 보약 한 사발 마시는 것보다 낫다. 세상의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연꽃 명당은 강릉의 선교장 활래정 앞 연당을 필두로 부여의 궁남지, 무안의 회산방죽, 경주 안압지 등이 있지만 대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팔조령 너머 청도 화양의 유등지를 빼면 섭섭하다.

유등지는 연못 안에 군자정이란 정자를 품고 있는데다 주변이 넓고 먼데 풍경이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지난 주말 오랜 고향 친구인 유등지 옆 레스토랑 토평연지(054-372-0901) 주인의 안내로 이곳 연당의 바람 골을 샅샅이 살펴 본 적이 있다.

나는 죽란시사 회원이 아니어서 조각배 타고 연못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대신에 연꽃바람 부는 바람 골에 앉아 영혼에 끼인 때를 씻어내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물론 연잎에 싸서 익힌 오리요리에 곁들인 술 몇 잔과 해리 벨라폰테가 부른 '자마이카여 안녕'이란 노래 때문에 취기가 바짝 오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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