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딜레마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고향이 어디니?"
소년은 잠시 망설였다. 선생님이 재차 물으시려는 순간 낭패한 목소리로 소년이 대답했다.
"대구라예…."
소년이 민망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의 살던 고향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만발하는 꽃피는 산골이거나 아니면 옛이야기 지절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는 넓은 벌 동쪽 끝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구와 같은 대도시, 고향이란 단어가 풍기는 이미지완 어울리지 않는다.
"고향에 가시겠네요, 고향이 어디세요?"
청년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했다.
"대굽니다."
청년은 변명하기 싫었다. 대구가 고향이라고 대답하면 대다수의 상대방은 되물었다.
"대구 말고 다른 고향 말이에요?"
자신이 태어난 대구 말고 다른 고향이라면 부모님이 태어나신 곳, 그도 아니면 조부모님, 더욱 거슬러 올라가 증조부모 이상 되시는 조상님들이 태어나신 곳….
그렇다면 나의 경우 부친이 태어나신 달성군 공산면 백안동(현 대구시)이나 모친이 태어나신 침산동을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조부가 태어나신 북성로를 고향동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윗대 조상 일부가 영천에서 대구로 이주했다. 조선시대 이야기다. 새로 정착한 대구는 기회의 땅이었다. 구한말 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일본인이 대구로 밀려들었다. 대구 읍성을 사이에 두고 빼앗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이전투구가 벌어졌다. 하지만 패망하는 나라 꼴을 닮았는지 경쟁하는 족족 조선인이 패했다.
한 가족은 흩어져 대구의 외곽지로 뿔뿔이 피란을 떠났다.
◇나의 고향은
나는 6'25전쟁이 끝난 이듬해에 대구시 공평동에서 태어났다. 대구백화점 인근이다.
육군 장교였던 부친은 결혼 후 대신동 골목 안쪽에 살았다. 어느 날 야밤 퇴근 시 지프를 돌려보내고 골목길을 걸어오다가 테러를 당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백주 테러도 심심찮게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살해 위협을 느낀 부친은 집을 옮겼다. 최소한 지프가 집 앞 대문까지 닿을 수 있는 곳으로, 그래서 공평동으로 이사했다.
전쟁 통에 비대하게 증원된 군인의 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감군정책, 군복을 벗은 부친은 사업을 시작했다. 군복을 벗고 막 시작한 사업은 잘될 리가 없었다. 집을 팔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대구의 중심부라 집값이 제법 나갔는가 보다.
사업자금을 충당하고도 대봉동에 660㎡(200여 평)의 집을 샀다. 마당에 작은 동산이 있었다. 아래채엔 낯선 이웃 여럿이 세 들어 살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부친이 급히 집을 팔았다. 덕산동 염매시장 건너편 동네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나는 복명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1년 반을 다녔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번에는 남산동 셋집으로 이주했다. 셋집 담 옆으로 한 발로 뛰어넘기 어려운 수채가 흘렀다.
남산국민학교로 전학했다. 학교의 환경이 이전 학교와 판이하게 달랐다. 사립학교로 출발한 복명은 한 학급에 수용된 학생 수도 소수일 뿐만 아니라 시설도 뛰어났다. 영사기를 가져와서 교실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남산의 교실에 수용된 학생은 시루에서 자라는 콩나물과 같았다. 한 학급 인원이 많을 때는 평균 80명이 넘었다. 책걸상이 부족하여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공부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계속 전학해 들어왔다. 급기야 강당을 교실로 사용했다. 강당의 마룻바닥을 칸막이도 없이 여러 학급으로 나누어 수업했다. 반과 반 사이의 구분은 칠판이 대신했다. 한 개의 칠판 아래 엎드려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바로 그 학급의 학생인 셈이다. 하는 수 없이 희도, 내당, 성남국민학교로 아이들을 분산시켰다.
학급마다 자신의 몸에 어울리지 않은 미국 옷을 입은 아이들이 십여 명은 되었다. 학부형 면담 때 학교로 찾아온 수녀님 때문에 나는 그들이 고아라는 사실을 알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야 한다."
전학 후 어머님의 첫 당부셨다. 학교 윗동네에 화장터를 끼고 사는 해방촌이 존재했다. 야트막한 산언덕에 피란 온 사람들이 빼곡히 밀려와서 천막을 쳤다. 천막 사이 좁은 골목길에는 오물이 넘쳤다. 화장장 굴뚝에서 낙하한 재가 부옇게 시야를 가리는 동네였다.
"학교 윗동네엔 절대로 가면 안 된다. 그리고 고아들도 조심해라."
그들을 미워할 리 없는 어머님의 이러한 당부 말씀은 혹시 시기 질투에 의해서 아들이 해코지를 당할까 봐 염려하신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믿는다.
학년이 올라가자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거의 반에 달하는 아이들이 수돗가로 가서 주린 배를 물로 채웠다. 다행히 나는 밥을 굶지 않았다. 군사정부가 들어선 후 부친이 중간 관리급 공무원으로 특채되었기에.
미국에서 굶주린 아이들에게 옥수수 빵을 공급했다. 미국 소가 먹는 사료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마저 학생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옥수수 빵이 부족할 때는 분유에 물을 타서 공급했다. 속이 허한 아이들에게 공급된 분유는 토사곽란의 원인이 되었다. 분유가 공급된 날이면 아이들의 토사물이 운동장에 가득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는 삼거리 골목길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윗동네 아이도 아랫동네에 사는 아이들도 무서웠다. 자연스럽게 삼거리 골목 안에 사는 나와 소수의 아이들은 우리들끼리 어울리며 지냈다.
소녀와 싹튼 첫사랑의 추억, 전쟁을 하자며 매일 시비를 걸어온 윗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하다가 대나무장대로 무장한 절대다수의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은 기억, 곤충채집을 갔다가 강물에 익사한 마당 넓은 집 아이까지.
공평동의 집도 대명동의 집도 심지어 침산동 외갓집도 제대로 남아있는 게 없다. 몇 채의 집으로 분산되었거나 화려한 도심의 건물로 탈바꿈되었다. 그러나 남산동은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인지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면 항상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고향의 모습이다. 남산동에서 보낸 기억만이 나에게 고향의 정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고향 재발견
"고향이 어디십니까?"
아아! 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아이들은 어떡할 것인가?
도심 아파트 숲 속에서 태어나서 수차례 거주지를 옮긴 우리들의 아이와 도심 재개발의 여파로 태어나서 자란 동네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아이, 소외된 지역에서 혹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자란 아이들은….
이들은 이원수의 '고향의 봄'이나 정지용의 '향수'를 부르며 막연하게 미지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어 살아야만 하는가?
아니다.
산천이 수려하고 고가가 즐비한 산골에서 태어나 등하교한 몇 십리 길의 추억을 간직한 고향이 있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추억을 가진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해질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의 고향은 과거처럼 한눈에 볼 수 있었던 고향산천이나 학교에 다니며 뛰어놀았던 등하굣길 주변에 한정시키는, 그러한 작은 영역에서 벗어나서 고향의 이미지를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대굽니다."
나의 경우 최소한 대구광역시 전체 바운더리가 나의 고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앞으로 고향에 대한 이미지도 확대 해석해야 할 필요성마저 제기된다. 마음속에 간직한 미지의 고향까지 내 고향의 영역으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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