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정만양'규양 형제와 영천 횡계리 향나무

자연에서 후진양성하던 형제애의 표상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는 18세기 형 훈수 정만양(鄭萬陽'1664~1730)과 아우 지수 정규양(鄭葵陽'1667~1732)이 은거하면서 제자를 길러내고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던 원림이 있는 곳이다.

그들은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영천성과 경주탈환전투에 크게 전공을 세운 호수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5세손이다. 우애가 좋기로 중국의 성리학자 정호'정이 형제 못지않을 뿐만 아니라, 학문에 임하는 태도 역시 그들을 닮으려 한 분들이다. 형의 아호의 머리글자 훈(塤)자와 아우 지수의 아호 지()자는 각기 '훈'이라는 악기와 '지'라는 악기의 이름으로 함께 불어야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두터운 형제애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나타낸 말이다.

횡계는 아우 지수가 먼저 개척했다. 1701년(숙종 27) 대전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살면서 태고와(太古窩)를 지어 자연을 즐기며 후학을 양성했다.

그후 형 훈수가 가족과 더불어 합류하니 형제가 함께 이곳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하게 된다. 1716년(숙종 42)에는 옥간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을 짓고, 1730년(영조 6)에는 태고와를 고쳐지으며 모고헌(慕古軒'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으로 당호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모고헌 뒤뜰에는 그들의 변하지 않는 형제애처럼 큰 향나무가 한 그루가 자란다. 정각사의 스님이 준 두 그루 중 이곳에 심은 한 그루라고 한다. 다른 한 그루는 대전마을 호수종택에 심었는데 역시 잘 자라고 있다. 형제는 횡계천 일원을 주자의 무이구곡처럼 가꾸고자 했다. 따라서 9곳에 풍광에 걸맞은 이름을 붙여 노래했다.

제1곡 쌍계(雙溪), 제2곡 공암(孔巖), 제3곡 태고와(太古窩), 제4곡 옥간정(玉澗亭), 제5곡 와룡암(臥龍巖), 제6곡 벽만(碧灣), 제7곡 신제(新堤), 제8곡 채약동(採藥洞), 제9곡 고암(高菴)이다.

형제는 일찍부터 종조부이자 교육자인 학암 정시연(鄭時衍'1632~1687)과 갈암 이현일(李玄逸'1627~1704)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당시 영남지방은 퇴계학의 바다라고 할 만큼 많은 선비들이 퇴계학에 몰두하였으나 형제는 달랐다.

이름난 학자가 누구든 당파가 무엇이든 찾아가 배우고 토론하여 폭넓게 공부를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윤증(尹拯'1629~1714)과 정제두(鄭薺斗'1649~1736), 정시한(丁時翰'1625~1707), 경주에서 이곳에 정착한 이형상(李衡祥'1653~1733) 등이다. 이들은 당대 쟁쟁한 학자들이기는 하나 남인들로서는 접촉을 기피하는 인물들이었다.

특히, 서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쓴 책을 보내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틀린 곳은 고쳐달라고 부탁한 윤증은 소론의 거두이다. 이런 점을 볼 때 훈'지 형제의 학문을 향한 집념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들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노론(老論)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을 때 일부 남인들이 연줄을 찾아 소위 출세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형제는 오로지 학문에 매달리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하면서 살고자 했던 선비는 아니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부당성을 호소하는 격문을 여러 고을에 보내 의병을 모았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지수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그들 형제가 보여준 또 다른 나라사랑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뿐만 아니었다. 피폐한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농지 소유를 제한하는 토지개혁을 주장했는데 이 개혁안은 그 후 나온 성호 이익 등 실학자들이 제안한 안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한다. 남인의 영수였던 갈암(葛庵) 사후 퇴계학은 '안동 등 북부지방에서는 밀암(密庵) 이재가, 영천 등 남쪽에서는 훈'지가 양분하여 영남사림을 영도했다'고 한다.

'곤지록''이기집설''의례통고''상지록''심경질의보유''계몽해의''경학연원록'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172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제자 중 두드러진 인물은 영조 재임 시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趙顯命'1690~1752), 승지를 지낸 청백리 정간(鄭幹'1692~1757),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참의에 이른 정중기(鄭重器'1685 ~1757) 등이 있다. 형제가 알뜰살뜰 보살폈던 두 그루 향나무는 사후 300여 년 동안 인공수피로 때운 흔적이 있으나, 아직도 푸름을 유지하여 두 분의 고매한 형제애를 상징하고 있다.

횡계구곡은 신록과 단풍이 아름다운 보현산 천문대로 가는 길가에 있다. 영천 화남을 지나 아름다운 숲 오리장림(五里長林'천연기념물 제404호)의 울창한 숲에 쉬었다가 더 진입하여 하북면 소재지 자천에 들러 남녀좌석이 따로 있는 1903년 미국인 선교사 어드만이 신자들과 함께 지은 교회를 보고 더 달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면 숲 속에 고색창연한 모고헌과 횡계서당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옥간정이 나온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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