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 키워드는 유니클로'자라'망고'H&M'갭'스파오'미쏘 등으로 대변되는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이다. 패스트패션은 철 따라 발 빠르게 내놓는 신상품과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는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지갑이 얇은 젊은 층들을 집중 공략하면서 패션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가고 있다.
패스트패션은 의류 소비패턴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유행을 좇아 짧은 기간 입고, 버리는 소비 트렌드가 나타난 것. 저렴한 가격 때문에 부담 없이 사서, 부담 없이 버리는 소비 성향은 패스트패션이 우리 사회에 드리운 그늘이다. 이에 따라 옷의 생산과 소비 속도를 한발 늦춰 보자는 슬로패션(slow fashion)이 패스트패션의 대항마로 부상하고 있다. 패션계에 부는 두 가지 바람을 취재했다.
◆젊음의 거리 장악한 패스트패션
대구시 중구 대구백화점에서 중앙파출소로 이어지는 동성로. 젊음의 거리답게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이 속속 입점해 성업 중이다. 나란히 자리 잡은 자라와 미쏘, 그리고 10여m 떨어져 있는 유니클로에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불경기라 손님이 없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인데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은 예외처럼 느껴질 정도다.
유니클로 매장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붙어 있는 특별 이벤트(할인) 문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남성의류와 아이들 옷을 판매하는 2층으로 올라가 가격표를 확인해 보니 7부 소매티는 9천900원, 편하게 걸쳐 입을 수 있는 티는 1만4천900원,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후드티는 2만9천900원이었다. 다운 재킷은 7만9천900원, 파카는 3만9천900원에 불과했다. 남성의류 코너에서 가장 비싼 옷은 바람막이 재킷으로 12만9천원이었다. 비싸지 않은 가격에 일부 품목의 경우 할인까지 해주다 보니 싼 맛에 반해 물건을 사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1층 여성 의류매장으로 내려와 다시 가격표를 들여다봤다. 레깅스 팬츠 3만9천900원, 리넨 셔츠 3만9천900원, 리넨 재킷 7만9천900원으로 10만원 넘는 옷을 찾기가 어려웠다.
대학생 신소정(23'여) 씨는 "비교적 싼 가격에 최신 유행의 옷을 살 수 있어 자주 찾는다. 유명 브랜드 옷 한 벌 살 돈으로 여러 벌의 옷을 구입한 뒤 기분에 따라 옷을 바꿔 입는다"고 말했다. 저렴한 가격이 입소문을 타면서 패스트패션을 찾는 중년층들도 늘고 있다. 유니클로 매장에서 만난 50대 여성은 "딸의 소개로 매장을 방문했다. 백화점에서는 옷 한 벌 사면 수십만원을 호가하는데 여기서는 비싸도 10만원이면 충분하다. 젊은 감각이 가미된 옷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이름만큼 성장세도 빠른 패스트패션
패스트패션은 디자인부터 생산'유통'판매까지 일괄적으로 이루어지는 특징을 갖고 있다. 과정이 일원화되어 있다 보니 소비자에 대한 반응 속도가 빠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신상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몇 주 단위로 새로운 아이템을 쏟아낸다. 중간 유통 단계를 줄임으로써 가격 거품도 제거했다. 유행에 민감하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패스트패션 매장은 쇼핑 천국이나 다름없다.
국내 패스트패션 시장은 해외 브랜드들이 장악하고 있다. 스페인의 자라와 망고, 스웨덴의 H&M, 미국의 갭, 일본의 유니클로 등 외국계 브랜들이 시장의 80~90%를 점유하고 있다. 여기에 국산 브랜드인 스파오, 미쏘 등이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국내 패스트패션 시장은 2008년 5천억원 규모에서 2009년 8천억원, 2010년 1조2천억원, 지난해에는 1조9천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눈에 띄는 점은 2008년 이후 전체 패션시장이 3.9%의 낮은 성장률을 보인 반면 패스트패션시장은 평균 56%의 신장세를 기록한 것이다. 지역백화점에서도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의 약진이 돋보인다. 롯데백화점의 유니클로는 지난해 25%에 육박하는 성장세를 보였으며, 대구백화점의 갭과 동아백화점의 스파오' 미쏘도 20%가량 매출이 늘었다. 패스트패션이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면서 국내 패션업체들도 패스트패션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최근 제일모직은 패스트패션 브랜드 에잇세컨즈를 출시했다.
◆패스트패션에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
패스트패션이 인기를 끌면서 환경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유행이 지나면 마구 버려지는 옷과 대량 소비되는 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화학염료는 환경오염의 주범이 된다는 것. 패션 분야 사회적기업인 오르그닷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한 해 한 명이 버리는 평균 30㎏의 옷은 여러 가지 환경문제를 낳고 있으며 많이 입는 청바지의 경우 제조 과정에 수많은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한 벌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물의 양도 1만ℓ에 이른다.
패스트패션은 환경문제뿐 아니라 사회문제도 일으킨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오르그닷에 따르면 옷의 순환 주기가 빨라지면서 세계적으로 한 해 1조달러의 옷이 소비되고 있지만 옷을 만드는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3%에도 못 미친다. 또 영국환경정의재단(EJF)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2위 면화수출국인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아이가 7세를 넘으면 3개월 동안 면화농장에 차출되어 일을 하며 그 기간에는 학교까지 문을 닫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패스트패션 소비를 지양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보은 전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은 "패스트패션 브랜드의 경쟁이 거세지고 있는 것은 '속도 사회'의 패러다임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그 뒤에 숨겨진 저임금의 열악한 제3세계 노동자 문제, 의류 폐기물로 인한 환경 문제 등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진화 오르그닷 대표는 "환경과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는 '윤리적 패션'이야말로 가장 유니크하고 스타일리시하다"고 말했다.
◆슬로패션, 대안으로 등장
패스트패션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관심받고 있는 것이 슬로패션이다. 슬로패션은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환경을 생각하고 유행보다는 개성과 취향을 중시한다. 친환경 소재로 옷을 만들고 옷을 한번 사면 오래 입는 것이 슬로패션의 특징이다.
슬로패션 바람은 선진국에서 강하게 불고 있다. '덜 사고, 중고품을 사용하자'(Buy less, buy used). 미국의 아웃도어 의류브랜드 파타고니아가 슬로패션 운동을 벌이면서 내세운 문구다. 파타고니아는 빨래를 많이 하면 옷이 금방 해지고 물과 에너지 소비량도 많아지기 때문에 슬로패션 운동의 하나로 세탁하지 않고도 옷을 깨끗하게 입을 수 있는 노하우를 소비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또 해진 제품을 수선해주는 서비스도 확대했으며 입다가 지겨워진 옷을 기부하거나 중고로 사고팔 수 있는 사이트도 개설했다. 영국에서는 몇 년 전 1년 동안 한 옷만 입자는 유니폼프로젝트가 가디언지를 통해 소개되면서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도 슬로패션 바람이 일고 있다. 2009년 문을 연 오르그닷은 유기농 면으로 만든 의류, 페트병에서 섬유를 뽑아 만든 유니폼 등을 생산해 친환경'윤리적 소비 운동을 벌이고 있다. 여성환경연대'여성민우회 등의 시민단체와 시민들이 주주로 참여해 세운 사회적기업 페어트레이드코리아 그루는 생산과정에서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고 가난한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공정무역 차원에서 슬로패션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또 중고품을 기증받아 재활용하는 '아름다운 가게'도 국내 슬로패션 운동의 선도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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