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이를 나란히 안기까지…몇천년이 걸렸을까

아내의 역사/ 매릴린 옐롬 지음/ 이호영 옮김/ 책과함께 펴냄

아내의 역사는 여성 인권 신장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남성의 소유물이나 종속적인 반려자였던 아내의 위상은 여성의 경제력 향상과 인권 운동 확산과 함께 남편과 동등한 지위의 동반자로 격상됐다. 책과함께 제공
아내의 역사는 여성 인권 신장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남성의 소유물이나 종속적인 반려자였던 아내의 위상은 여성의 경제력 향상과 인권 운동 확산과 함께 남편과 동등한 지위의 동반자로 격상됐다. 책과함께 제공

개인사업을 하는 박모(42'여) 씨는 하루를 10분 단위로 쪼개 산다. 오전 6시 30분이면 일어나 회사원인 남편과 중학교 2학년 아들의 아침식사를 챙겨주고 사무실로 나선다. 오전 9시면 직원 조회를 한 뒤 거래처 계약서나 물품 주문을 확인하고 급한 결제를 마치면 점심 약속 장소에 나간다. 오후에는 거래처 몇 군데를 돈 뒤 회의를 하고,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가 식사를 챙기면 오후 8시가 넘는다. 아들의 학원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마중 나가는 일도 박 씨의 몫이다.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박 씨는 "내가 도대체 결혼은 왜 했나"하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난다.

박 씨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일까. 사업을 하거나 직장에 다니는 여성에게 아내가 된다는 건 씁쓸한 축복일 수 있다. 동등한 가사부담이나 전업 남편이 일상적이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곧 '슈퍼우먼' 입문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년 전만 하더라도 결혼은 전업주부를 의미했고, 남편의 경제력에 의지하며 내조 잘하는 게 미덕이었다.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은 미국이나 유럽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1960년대까지 여성의 역할은 어머니와 아내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남자는 능력 있는 부양자여야 했고, 여자는 주부이자 어머니여야 했다. 여성의 경제력이 커지고 여권 신장이 이뤄진 1970년대 이후에야 '아내상'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변화가 일어났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아내상(像)'은 '여성 인권'과 맥을 같이한다. 남편의 소유물이자 '종속적인 반려자'에서 남편과 동등한 사회적'경제적 주체로 자리 잡기까지 여성들은 3천여 년에 가까운 지난한 세월을 견뎌야 했다. '살림 잘하고 자식 잘 키우는' 전통적인 전업주부가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동등하게 가사 분담을 하는' 동반자 아내가 된 건 불과 수십 년 전이다.

이처럼 매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는 성경과 그리스'로마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혼 여성들이 겪어온 정체성의 변화 과정을 추적한다.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규정돼 왔는지 꼼꼼하게 짚어낸다.

성경시대와 고대 그리스에서 젊은 여성은 결혼 전까지 아버지의 소유였다. 결혼은 남편으로 '소유권 이전'을 뜻했다. 물건을 넘겨받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창세기 속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을 일했다. 로마시대에 이르러서야 여성의 의지가 다소 인정됐다. 제한적이지만 이혼의 가능성도 열려 있었고, 부유한 아내는 괄목할 정도의 자유를 누렸다. 유베날리스의 시에 등장하는 로마의 귀부인은 간통하다 걸리자 항변한다. "오래전에 서로 합의했잖아요.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는 나 좋은 대로 할 수 있다고요."

중세시대에 여성은 성적 욕망이 제거된 소유물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성혼 맹세를 하고 예물을 교환하는 결혼식은 13세기부터 치러지던 '양도' 의식이다. 귀족들은 결혼을 유력자끼리 결탁하거나 유산을 물려주는 수단이었다.

18세기 이후 시민혁명과 전쟁은 여성에게 '정치의식'과 독립성을 찾는 새로운 기회가 됐다. 미국 독립전쟁 중에 많은 아내들이 전쟁 통에 집을 비운 남편의 대리인 역할을 했고, 남녀가 서로를 동반자로 여기는 결혼형태가 확산됐다. 프랑스 혁명 당시, 라 빌리루에 백작부인은 반혁명 세력이던 남편 때문에 투옥되자 '누구도 그 아내를 남편의 행동을 이유로 기소할 수 없다'고 주장해 무죄 석방되기도 했다.

1879년 노르웨이에서 발표된 작품 '인형의 집'은 매우 상징적이다. 순종적인 아내로 살던 노라는 어느 날 자신의 역할이 '인형'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난다. "난 모든 것에 앞서 인간이야"라는 외침을 남긴 채.

아내의 지위를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남성들이 대거 전쟁터로 가자 남성들의 빈자리는 아내들의 몫이 됐다. 아내들은 조선소나 철강공장 등 금녀의 영역까지 활약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기혼 여성들의 절반 이상이 경제력을 갖게 되면서 아내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믿음이 흔들렸고, 가사와 육아도 점차 남편의 책임이 강화됐다. 현재 미국에서는 200만 명이 전업 남편으로 가정을 지킨다.

저자는 "남편에게 의존하고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전통적인 아내상은 사라졌다"며 "아내의 길을 선택한 많은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바탕으로, 그리고 남편과 동등한 가사분담을 통해 더 완벽한 부부 관계를 창조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강조한다. 648쪽. 2만8천원.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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