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1-등불
촛불은 자신의 몸을 태워서 어둠을 밝힌다. 비록 세상의 빛은 되지 못하나 부처님의 원력으로 '자비의 등불'을 밝히는데, 작은 힘이나마 동참을 할 양으로 동화사를 찾았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등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때마침 한 남자분이 가족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꼬리표를 힘들게 달고 있다. 가족을 위한 기도는 보통 어머니들의 몫으로 생각한다. 이 생소한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부인과 자식들에게 '지혜의 등불'을 밝혀주고 싶은 부성애, 높은 받침대에서 겨우 중심을 잡으며 정성스레 달고는 내려와서도 안전한가 또 확인한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른다. 마음을 표현을 못 하고 있지만 퉁명한 말투 속에 질박한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 추운 겨울날 시골에 다녀오면 연탄불은 꺼져 있었다. 온기 없는 냉방에서 감기라도 걸릴세라 부인과 아들을 이불로 감싸놓고, 빠르게도 연탄불을 피웠다. 방안 가득 따뜻한 훈기로 가족을 보듬어주던 사람. 아버지들의 사랑은 아마도 이런 것인가 보다. 오늘 스쳐가는 이 인연에 내 마음이 행복해진다. '반야심경' 가운데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으로 인하여 108번뇌가 생성된다고 한다. 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귀로 법문을 들으며, 코로는 향기로운 향기를 맡고, 혀로는 물 한 모금의 청량함을 맛보고, 몸으로 대자연을 느끼며, 의로서 법을 세운다. 좋은 인연으로 때 묻은 한 생각을 내려놓으면 108번뇌가 소멸된다고 한다.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돌아오는 내 얼굴이 아마도 환해졌으리라.
박윤효(대구 남구 대명3동)
♥수필2-돼지국밥
대구 생활 30년 만에 귀향했다. 문득 어릴 적 즐겨 먹었던 돼지국밥이 생각났다. 시골 친구들과 전통시장인 하양장을 찾았다. 산과 들판이었던 주위는 신흥 시가지로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고향의 장터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대형소매점이 시골 깊숙한 곳까지 침입하여 영세 상인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그러나 장날 시장통은 활기가 넘쳤다. 주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 오롯이 남아 있어 반가울 따름이다. 돼지국밥집은 초저녁인데도 손님으로 붐볐다. 숟가락을 세워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 고기 인심이 넉넉하다. 국물은 양껏 먹으라는 투박한 주인 아줌마의 따사로움은 온실 같다. '투발'보다 장맛이다.
어린 시절, 국밥 한 그릇을 얻어먹고자 어머니를 많이 졸라댔다. 치맛자락을 붙잡고 이십 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 어렵사리 시장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복잡한 틈새를 비집고 자리 잡은 허름한 돼지국밥집, 군데군데 털을 단 비곗 덩이가 헐렁한 국물 속을 헤엄치고 있었지만, 그 맛이란, 나의 국그릇에는 쌀밥이 말려 있고, 어머니의 국그릇에는 국수가 몇 가닥 널브러져 있었다.
어머니는 "나는 배 부르다"며 고깃덩이를 옮겨 놓는다. 어머니의 주린 배는 치마의 말 끈으로 동여매었으리라. 옛 친구들 하나 둘 떠나가고 환경은 바뀌어도 수육의 맛과 고향의 인심은 그 자리에 있었다. 반주로 마시는 젖빛 막걸리와 구수한 냄새를 피워 올리는 희뿌연 김 사이로 어머니의 영상이 겹쳐진다.
박기옥(경산시 와촌면 박사리)
♥수필3-"이보시게 난 항상 예 있소!"
보현산 천문대 아래에 자리한 마을 일명 '별빛촌'을 카메라에 담으려 몇몇 분들과 함께 찾아들었다. 이름이 말해주듯 어릴 적 방천에 누워 헤아려보던 금가루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하늘 가득 부서져 내리던 별들이 여기서는 밤마다 화려한 쇼를 펼치는가 보다. 마을 어귀에 우뚝 선 정자나무 밑을 지나 마을의 초입에 들어서자 이방인의 발걸음이 귀에 거슬렸는지 제일 먼저 멍멍개가 짖어 반긴다.
낯선 동네라 처음은 조심스러웠다. 있는 듯 없는 듯 키 낮은 돌담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담쟁이의 연두색 햇순과 더불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한 게딱지만 한 집들을 앵글에 맞춘다. 한데 잠시 후 동네 노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가만히 하는 양을 지켜보더니 "꽃은 안 찍어요!"하고 말을 건네는가 싶더니 곧장 앞장을 선다. 아니나 다를까 한 집 건너기가 무섭게 금낭화가, 하늘매발톱이 기다렸다는 듯 고운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우리 일행들은 할머니들의 꽁무니를 따라 자그마한 동네의 골목골목을 지나 앞마당이랑 뒤란을 온통 헤집고 다닌다. 거기다 우리를 따라나선 꼬마는 길옆에 있는 우물의 두레박이 마냥 신기한지 다짜고짜 물질이다. 금세 길바닥은 진창으로 변해 다니기조차 불편하다. 녀석의 저지레에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다. 금방이라도 할머니들의 "네 엄마가 누구니?"하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조마조마한 중에 "꼬마야 재밌니?"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말을 붙인다. 그제야 녀석도 지은 죄를 대충 알아차린 듯 뚱하게 서서 할머니를 쳐다보자 "괜찮아!"하고 오히려 위로다.
그랬다. 젊은이들이 모두 떠난 농촌의 노인들은 사람들이 그립다. 한데 모처럼 찾아든 사람들이라고 쌀쌀맞기가 그지없어 말 붙이기조차 겁난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잠시나마 말을 붙이고 정담을 나눈 우리 일행들이 고마웠던 모양이다. 이윽고 짐을 챙겨 떠나는 발걸음을 붙잡아 채전 가득 싱싱하게 흐드러진 푸성귀를 가리켜 마음껏 속아 가란다. 그것도 잠시 마침내 떠나는 길손에게 "틈나면 종종 들르세요!"하더니 꼬마를 돌아보고는 "애야 재밌지? 담에 엄마랑 또 놀러 와! 그때는 이 할미가 맛있는 거 줄게!"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배웅한다. 외로우신 분들! 골목길에 늘어선 할머니들의 등 뒤로 "이보시게 난 항상 예 있소!" 하는 듯 보현산의 천연덕스러운 산 그림자가 꼬리를 물어 길게 내려앉는다.
이원선(대구 수성구 중동)
※지난주 선정되신 분은 최인숙(대구 달성군 다사읍) 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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