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리수는 빅터레코드사 전속으로 활동하면서 1930년대 초반 축음기와 SP음반의 보급에 큰 공적을 쌓았습니다. 빅터레코드사는 이기세 선생이 문예부장 일을 맡아보면서 1937년 늦가을 문을 닫을 때까지 도합 600여 장의 음반을 찍어냅니다.
빅터레코드사를 주무대로 해서 이애리수는 '밤의 서울''상사타령''이국의 하늘''복사꽃' 등 무려 100여 장이 넘는 음반을 잇달아 발표합니다. 이애리수의 노래에 가사를 제공한 분들은 왕평, 김영환, 윤백남, 이현경(이기세), 전수린, 이광수, 유백추, 이고범, 이청강 등입니다. 당대 최고의 문사였던 춘원 이광수 선생이 이애리수에게 '슬허진 젊은 꿈''오동꽃' 등의 가사를 써준 것은 매우 이채롭습니다. 작곡을 맡은 분들은 전수린, 김교성 등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작곡을 전수린 선생이 도맡았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이애리수의 인기는 193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왕수복과 선우일선을 비롯한 기생가수의 출현, 이난영, 전옥 등 새로운 창법과 감각을 지닌 후배가수들에게 가요팬들의 시선이 쏠리게 된 것이지요. 창가풍의 단조로운 음색에 익숙한 이애리수의 노래는 인기 반열에서 차츰 퇴조하게 됩니다. 묵은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간의 질서를 구축하는 변화의 거친 물결은 그 자체가 너무나 비정하고 막을 수 없는 것일 테지요.
이러한 때 이애리수는 그녀의 노래를 몹시 사랑하던 한 대학생과 우연히 만난 이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연희전문 졸업반 학생이던 배동필! 하지만 이미 배동필에게는 부모가 맺어준 아내가 있었던 것이지요. 대학생과 가수라는 현격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행한 난관이 수렁처럼 앞을 가로막습니다. 어른들은 비천한 광대와 다를 바 없는 가수에게 빠져있는 아들을 심하게 질책하며 두 사람의 만남을 금지시켰습니다.
만날 기회조차 잃어버린 그들은 이승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깊은 밤 몰래 만나 극약을 함께 나누어 마시고 정사를 시도합니다. 이 대목은 마치 김우진과 윤심덕의 정사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윤심덕 커플은 죽고 말았지만 이애리수 커플은 아슬아슬한 순간에 구출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납니다. 배동필의 하숙방에서 식모에게 발견된 두 사람은 병원으로 실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다시 기력을 회복한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아낸 듯한 노래 '버리지 말아 주세요'(이고범 작사, 전수린 작곡)를 마지막 곡으로 취입하게 됩니다. 그 애처로운 음색은 듣는 이의 가슴을 서러움으로 빠뜨렸고, 눈물까지 뚝뚝 흘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완고하던 배동필 부모는 이 노래를 듣고서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을 승낙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댁에서는 두 번 다시 가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요구했고, 이후 그녀는 가요계에서 그 모습을 아주 감추어버렸습니다. 필시 한 가정에서 평범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아간 듯 여겨지지만,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인지 소상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가을밤만 되면 처량한 귀뚜라미 소리를 효과음으로 해서 이따금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귀에 익은 가수의 슬프고 쓸쓸한 노래가 있습니다. 이애리수의 노래 '황성의 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는 이름조차 '황성 옛터'로 바뀌어버린 '황성의 적'과 그 모든 사연에 대하여 환하게 아셨으리라 믿습니다. 줄곧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노래 한 곡이 지닌 위력은 그토록 완강하던 식민지의 어둠을 조금씩 깨어 부수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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