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수도'로 불렸던 구미가 위기를 맞고 있다. 대기업들의 줄폐업과 생산기지 해외 이전으로 일자리가 사라지자, 인파로 북적였던 번화가마저 텅 비어가고 있다. 구미 재생을 위한 국가 차원의 전방위적 재정비와 실효성 있는 지원이 절실한 때다.
◆구미, 산업수도의 그림자
지난 21일 오후 1시쯤, 구미국가1산업단지 내 제조업체 A사. 한창 생산라인이 가동돼야 할 시간임에도 수백 평 규모의 공장 앞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철제 셔터는 닫힌 채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건물 외벽에는 '공장 매매'라는 현수막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취재진은 차량을 타고 약 1시간 동안 산단 내부를 둘러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적이 사라진 공장 건물과 주차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공장 특유의 기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낡은 현수막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구미 산업의 침체는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이 지역을 지탱해온 화섬 산업과 디스플레이 산업을 중심으로 주요 기업들이 폐업하거나 생산을 중단하면서 지역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화섬·디스플레이 산업 줄줄이 폐업
SM그룹 계열 화섬기업 TK케미칼은 최근 3년간 연 200억원 이상의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2023년 6월 폴리에스터 원사 사업부문 영업을 중단했다. 중국 기업의 저가 공세와 폴리에스터 산업 침체가 직격탄이 됐다.
국내 주요 폴리에스터 원사 제조업체 성안합섬도 2023년 4월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당초 특수사 위주로 재가동을 계획했으나 중국산 수입사 가격 약세로 재가동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2023년 12월 화섬 제조업을 완전히 포기했다.
디스플레이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구미산단 1호 외국인 투자기업인 동양전자초자는 LG디스플레이에 LCD용 유리를 납품해 왔지만, 주요 생산라인(P6E) 중단 여파로 2023년 6월 폐업했다. 한때 매출 1조원에 육박했던 기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LG디스플레이도 중국산 LCD 저가 공세에 밀려 구미 P1~P5 공장을 단계적으로 폐쇄했다. 현재는 P6·E5 공장만 가동 중이며, 차량용 디스플레이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했다. 구미 인력은 한때 1만5천명에서 6천명 수준으로 줄었다.
◆ 대기업은 매각 추진…협력업체는 생존 몸부림
최근에는 다수의 기업체가 매각되거나 매각을 추진하는 사례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어 지역 경제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 유일의 반도체 웨이퍼 생산기업 SK실트론은 최근 SK㈜가 사모펀드와 매각 협의를 진행하며 경영권 이전 가능성이 제기됐다. 본사와 공장이 위치한 구미에는 약 3천500명의 인력이 근무 중이다. 포스코퓨처엠도 고부가 제품 중심 재편을 이유로 구미 양극재 공장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구미의 한 LCD 검사장비 업체 대표는 "예전엔 삼성, LG에서 줄 서서 주문이 들어왔다. 그런데 생산기지가 다 중국으로 넘어갔고, 지금은 한 대 납품하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다음 주문이 없다. 기술은 있는데 그 기술을 사 줄 고객이, 시장이 없다"고 말했다.
이 업체는 현재 자동화 검사, 레이저 응용, 방산용 미사일 검사 장비 등으로의 사업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력과 시장이다. 경력직 기술 인력은 수도권으로 빠져나가고, 남은 인력은 "돈 안 되는 개발은 의미 없다"며 기술 혁신을 꺼리고 있다.
◆구미역 번화가도 '텅텅'
제조업의 쇠락은 도심 상권에도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한때 구미 최대의 번화가로 불렸던 구미역 일대. 퇴근 시간 직후면 인파로 북적이던 이 거리에는 이제 빈 점포들과 썰렁한 거리가 먼저 눈에 띈다. 간판 불이 꺼진 상가, 텅 빈 테이블, 거리 사이사이 걸린 임대 안내문은 산업도시 쇠퇴의 후방 충격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구미역 인근에서 20년째 식당을 운영해온 한 자영업자는 "옛날엔 하루 200명 넘게 손님 받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 10팀 넘기면 다행이다. 공단이 죽으니 우리도 같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미 산업계 관계자는 "구미는 아직 '산업수도'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지금처럼 방치된다면 그 이름조차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며 "국가가 외면한다면, 구미는 대한민국 산업의 가장 뼈아픈 실패 사례로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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