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시대를 맞아 세계경제의 중심축으로 새롭게 부상하던 한'중'일 삼국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일고 있다. 영토분쟁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바람이다. 잊혀 가던 구시대의 유물이 최근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이면서 그간 공들여 쌓아 왔던 동북아 삼국 간 우호 협력의 분위기가 와해되고 더 나아가 지역경제 부흥의 단초가 될 경제적 동력마저 상실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한'중'일 세 나라의 GDP 합계는 약 14조달러로 세계 GDP의 20%를 차지했다. 세 나라의 교역량을 합하면 전 세계 무역규모의 18%에 달한다. 오랜 세월에 걸친 전쟁과 갈등의 역사로 국민 정서 저변에 앙금이 채 가시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경제적 교류 증대를 통해 평화와 공동번영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근래의 공감대였다. 한류가 중국과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3국 모두에서 상대국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것도 이러한 흐름에 호재로 작용했다.
그러던 것이 몇몇 돌발변수가 불거지면서 난기류에 빠졌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계기로 다시 수면으로 떠오른 한'일 간 독도문제와 때마침 재점화된 중'일 간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 논쟁이 세 나라를 해묵은 대립으로 이끌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어도 역시 아직 본격적으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한'중 간 영토분쟁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잠재적 불씨다. 계속되는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에 시달려온 우리로서는 조그만 암초 섬을 탐내는 대국답지 못한 처사가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지난주 가본 천안 독립기념관에서는 중국의 항일전쟁 역사 유물과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행사장에 내걸린 기록 중에는 우리 독립군과 힘을 모아 항일투쟁을 한 중국군의 사진도 몇 장 있었다.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현대식 전투기 앞에서 미군과 함께 환하게 웃는 중국군의 모습은, 얼마 안 되는 독립자금을 모아 러시아 주둔 체코군으로부터 구입한 옹색한 전투장비 옆에서 초라한 행색을 하는 우리 독립군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만주와 미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던 수많은 독립투사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해 종전 후 일본으로부터 공식 항복문서 한 장 받지 못했던 아픈 현실이 겹쳐졌다.
6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경제력에 의해 국가적 위상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여전하다. 우리가 세계 10위권의 경제국가로 급속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중국과 일본보다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부품소재 부문의 경쟁력을 높여 대일무역적자를 줄여야 하고, 중국과는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기술격차를 더욱 벌려가면서 중국 내수시장에도 본격 진출해야 한다. 한발 앞선 일본과 무섭게 추격해오는 중국 사이에서 우리의 자리를 확고히 하는 것이 시급하다.
삼국 간에는 경쟁과 함께 상호협력도 필수적이다. 이미 협상이 시작된 한'중 FTA를 포함해 한'중'일 FTA가 체결된다면 유럽연합(EU)을 능가하는 거대 시장이 탄생하게 된다. 지난해 삼국 정상의 합의에 따라 출범한 한'중'일 협력사무국이 그 실행기구로 실무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극심한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안고 있으면서도 경제통합을 넘어 화폐통합을 이뤘던 유럽의 사례에 비춰볼 때 한'중'일 경제협력체 탄생이 결코 난망한 일은 아니다.
한'중'일의 경제 규모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이들의 반목은 각 나라의 불행을 넘어 세계경제에 위험요소가 될 수도 있다. 객관적 자료와 냉철한 머리가 필수적인 영토문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풀어가되 전문가의 판단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역사적 사실 등의 자료를 제시 교환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설득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는 것이 사태해결의 지름길이다. 그런 점에서 삼국 간 전문가 포럼을 만들어 공동연구와 정기 교류를 진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결국 꾸준한 노력으로 감정의 응어리를 풀고 신뢰를 쌓아가면서 협력을 활성화하는 것이 근본적 해법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지난 5월 삼국 정상이 베이징에서 다시 확인하였듯 외환위기 방지를 위한 통화교환협정을 골자로 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체제를 강화하는 후속조치가 필요하다. 또한 지진 등 재난구호, 원자력 안전 등 역내 안전보장 이슈에도 각국이 실질적인 협력체제를 가동할 수 있을 것이다. 올가을 삼국 정상이 다시 만날 때는 영토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경제영토 확장에 뜻을 모으기를 기대해 본다. 세계경제의 엄혹한 현실을 직시한다면 지금은 감성과 열정을 가라앉히고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다.
이재술/딜로이트안진 총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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