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김정구의 노래와 두만강(하)

가수로서 첫 훈장…가는 곳마다 '눈물 젖은 두만강' 불러

가수 김정구는 191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습니다. 5남매 중 셋째였는데, 모든 형제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맏형은 가수와 작곡가를 겸했던 김용환, 형 용환의 부인이었던 정재덕도 가수로 활동했지요. 누나 김안라는 소프라노 가수였습니다. 동생 김정현은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기독교 집안의 분위기가 이런 여건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들 형제는 가족노래선교단을 꾸려서 동해안과 금강산 부근의 마을을 다니며 연주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김정구는 원산의 광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점에서 점원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20세 되던 1936년 서울로 가서 가수가 되려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김정구의 첫 데뷔는 뉴코리아레코드사였습니다. '어머님 품으로' '청춘 란데뷰' 등의 음반을 발표하고, 단번에 인기가수 명단에 오르게 되었지요. 뉴코리아레코드사는 경영난으로 1년이 채 안 되어 문을 닫게 되었고, 김정구는 오케레코드사 창설의 숨은 주역인 김성흠의 제의를 받아서 오케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1937년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첫 작품은 '항구의 선술집'(박영호 작사'박시춘 작곡'오케 1960)입니다. '부어라 마시어라 이별의 술잔/ 잔우에 찰랑찰랑 부서진 하소'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당시 청년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오케레코드사의 간판격 가수이자 인기가수로 등극한 김정구는 1937년 한 해 동안 무려 18곡이 넘는 가요를 발표합니다. 당시 부른 노래들은 '황금송아지' '눈깔 나온다' '광란의 서울' 등으로 곡목만 보더라도 일그러진 식민지 현실에 대한 냉소와 풍자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런 노래를 만요풍(漫謠風)의 노래라고 합니다. 김정구가 무대에서 이런 만요풍 노래를 부를 때는 반드시 코믹한 제스처를 사용해서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습니다.

이후로 크게 히트했던 김정구의 노래들은 '왕서방 연서' '총각진정서' '앵화폭풍' 등입니다. 일제강점기 말 조선악극단 도쿄 공연 때 김정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통한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정구는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피란 가서 떠돌이 빵장수, 지게꾼, 무대 출연 등으로 고달픈 생존을 이어갔습니다. 1975년 가수 김정구는 회갑을 맞아 성대한 기념무대를 마련합니다.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도 가수로서 맨 처음 받았고, 가는 곳마다 오로지 '눈물 젖은 두만강'만이 김정구의 단골 레퍼토리였습니다.

1982년은 가수 김정구에게 매우 뜻 깊은 한 해였습니다. 왜냐하면 떠나온 고향 북녘 땅에서 열리는 고향방문단 특별공연에 출연하여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북한 주민들 앞에서 목이 터져라 불렀기 때문입니다. 모든 원로가수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 무대에서 사라질 때 김정구는 칠순이 넘은 나이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여전히 왕성한 무대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런 모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지요. 마침내 1992년 김정구는 노환으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떠나갑니다. 진작 이민을 간 가족들 곁으로 갔습니다.

1992년 9월 25일, 가수 김정구는 향년 77세로 미국 땅에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한반도의 북녘 하늘로 이승의 모든 속박과 부자유에서 풀려난 김정구의 영혼은 산새처럼 훨훨 날개를 저어 찾아갔을 것입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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