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누며 의미있게… 착해지는 송년회

지역 연말모임 변화상 알아보니…

술 대신
술 대신 '문화'를 마신다. 지난해 대구시내 한 식당에서 열린 송년 모임에서 한 참가자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의미 있는
의미 있는 '착한 송년회'가 늘고 있다. 대구 서구청 공무원들은 송년회 경비를 아껴 대구 원대동에 있는 제일종합사회복지관에서 무료 급식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송년회 시즌이다. 평소 '먹고 죽자'를 외쳐왔던 주당들이 1년 내내 손꼽아 기다려왔던 '대목'이다. 그러나 올해는 이런 기대를 살짝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먹고 마시는 송년회가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봉사, 공연 송년회 등 다양한 종류의 송년회 문화가 확산되고 있어서다. 송년회가 폭음으로 치러야 하는 '판박이 회식'이 아닌 '1년에 한 번 있는 특별한 이벤트'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점점 주당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 악화된 경제난에다 대선정국까지 겹치면서 기업체들이 '송년의 밤' 행사를 대폭 줄이면서 단체의 성격이나 특성에 따라 차별화된 형식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가족과 지인, 동호회 중심의 송년문화가 늘고 있는 점도 달라진 현상이다. 맞춤형 장소도 등장하고 있다. 공연장, 펜션, 봉사하는 장소 등 과거 식당 중심의 송년회에서 각양각색의 장소들이 등장하고 있다.

◆술자리 NO, 문화'여행 YES

최근 대구지역 극장과 공연가에는 직장인들의 단체 예매가 늘고 있다. 송년회 모임 때 식사는 간단히 해결하고 대신 영화나 연극, 뮤지컬 등을 보며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다. 특히 최근 20, 30대 직장 여성들을 중심으로 공연 송년회가 자리 잡아 가고 있다. 6일 일찌감치 송년회 행사를 가졌던 직장인 강미정(33'여) 씨는 "동료들이 술을 별로 즐기지 않아 팀장에게 건의해 연극을 보기로 했다. 동료들과 함께 연극을 즐기다 보니 가족 같은 느낌이 들었고 업무 스트레스도 줄일 수 있었다"고 했다.

유통업에 종사하는 김진형(38) 씨는 올해 산악 동호회 송년 모임을 술자리 대신 뮤지컬 '레미제라블' 관람으로 정했다. 주말마다 산에 오르면서 가족들에게 소홀했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 회원들이 생각해낸 대안이다. 부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모임 방식을 고민한 결과 뮤지컬 감상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올해 설립된 '2040 미래연구소' 직원들은 술자리 송년회 대신 단체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도건우 소장은 "직원들과 함께 31일 송년회와 신년회를 겸해 연극 한 편을 보고 난 후 새해 일출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연구소가 생긴 원년인 만큼 직원들 간 단합을 위해 여행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문화예술계도 이 같은 분위기를 겨냥해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예술단체와 소극장 등은 이달 들어 각종 콘서트나 연극, 뮤지컬 등을 집중 배치하고 문화 송년회를 찾는 직장과 가족 등 단체 관람객을 대상으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역 공연 관계자는 "연말 과음으로 잊고 싶은 기억을 만드는 것보다 재미있고 의미 있는 공연을 보려는 단체 관람객이 늘면서 새로운 송년회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여행업계도 송년회 관련 상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여행과 문화' '대구 답사 마당' 등 지역 여행사들도 송년회 겸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위해 새해 일출여행 상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형식'장소 파괴

송년회의 성격이 바뀌다 보니 모임의 형식과 장소도 다양해지고 있다. 대구 로즈마리병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송년 모임 장소를 술집이 아닌 곳으로 정했다. 지난해 연말 1박 2일 일정으로 팔공산의 한 테마리조트에서 송년회를 열었는데 직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 올해도 술집을 피하기로 했다. 대신 11일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 예정이다. 산모와 남편도 함께할 수 있다. 로즈마리병원 관계자는 "단순히 술만 마시는 송년회를 탈피하기 위해 장소를 리조트나 가족들이 자주 찾는 패밀리레스토랑 등으로 정했다. 부서 간, 직원 간 소통과 화합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동아백화점은 17일부터 28일까지 각 점별로 돌아가면서 송년회를 겸한 노래 축제를 연다. 직원들이 참여해서 노래와 춤 등 장기자랑을 벌여 푸짐한 경품을 나눠주면서 직원들이 한 해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흥겨운 시간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회사 측은 직원들에게 술 대신 김밥을 나눠줄 예정이다.

대구 지역 여행동호회인 한가람회는 올해 송년 모임 형식을 바꿨다. 매년 순번을 정해 회원 집을 방문, 송년회를 하던 기존 방식을 깨고 각자 음식을 만들어 파티를 즐기기로 했다. 가족 동반 모임이라 음식을 한 집이 한꺼번에 해야 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이 모임의 회장인 박희정(42) 씨는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회원들의 사정을 감안해 송년회 준비를 위한 고통분담(?) 차원에서 짜낸 묘안"이라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호텔 연회장은 울상이다. 인터불고 호텔은 6일 현재 연회장 예약률이 전년 대비 20%가량 감소했다. 기업체 수도 줄고 규모 자체도 줄고 있다. 김정배 홍보팀장은 "최근 송년회 문의가 뜸하다. 송년회 장소가 다양화되고 있는데다 대선을 앞두고 있어 행사 자체를 자제하는 분위기다"고 했다. 노보텔 등 다른 곳도 사정은 마찬가지. 노보텔 황지연 홍보 팀장은 "연말 송년회를 위해 특별 이벤트까지 준비했지만 예약률이 높지 않다. 대신 회비로 운영되는 협회나 단체에서 주최하는 송년 모임이 몇 건 있을 뿐이다"고 전했다.

◆'착한 송년회'

송년회 대신 기부나 봉사활동 등 '착한 송년 모임'도 늘고 있는 추세다. 송년회를 사회공헌 행사 등 의미 있는 봉사활동으로 대체하는 기업이나 관공서도 적잖다.

'경북농민축산'은 송년 모임 대신 최근 소고기 등 자사 생산품들을 복지시설과 저소득층 가정에 전달하는 이벤트를 준비 중이다. 손창민 대표는 "남아도는 물량을 직원들이 구입하고 그 수익금을 기부할 예정이다. 예전에는 직원들끼리 먹고 즐기는 송년회를 했지만 최근에는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는 형태로 송년회 분위기를 바꾸기로 의기투합했다"고 밝혔다.

대구 서구청 기획예산실 직원 25명은 15일 연말 송년회 모임 경비로 쌀을 구입해 지역 복지단체에서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벌일 계획이다. 김천호 계장은 "직원들이 직접 쌀을 구입하고 찬거리를 준비해 하루 동안 봉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전했다.

영남이공대 입학처 직원 8명도 20일 송년회 경비를 아껴 지역 보육원에서 산타 파티를 열기로 했다. 직원들이 직접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선물을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줄 계획이다. 이재용 입학처장은 "평소 학생들이 홀몸노인이나 지체부자유 어린이를 돕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고 동참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전석장애인 복지스포츠센터 최창덕 소장은 "연말연시에 복지시설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잦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에는 돈이나 상품 기부 대신에 봉사활동을 하면서 송년회 자체를 복지시설에서 갖는 단체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계명대 사회학과 임운택 교수는 "송년회 형식이 다양해지는 반면 규모가 작아지고 검소해지는 것은 서민경제 침체에 원인이 많다. 아울러 가족 중심의 가치관이 확산되다 보니 여성이나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송년회가 진화하고 있다. 또 송년회를 작지만 의미있게 보내자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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