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한 살. 대학을 졸업한 지 몇 년 됐고, 이제 결혼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생겼다. 여전히 미술은 나에게 재미있고 큰 영감을 준다. 하지만 아직도 '미술'이 '밥'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물류센터에 다니고 있다. 보수가 적더라도 오후 4시 30분 이전에 퇴근하는 것은 오로지 작품활동을 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요즘 '앞으로 어떻게 작업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작가에게 이 질문은 곧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의미다.
작가 김승현의 이야기다. 경북대 미술학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하던 김승현은 돌연 사진과 설치, 개념미술로 자리를 옮겨온다. 그리고 졸업한 후 미술시장 주변에서 '작가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김 씨는 대구미술관 전시에는 'born' 시리즈를 발표했다. 작품이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작품이 소장돼야 하고, 그래야 작가도 생존할 수 있다. 그래서 퀸의 작품을 패러디한 'I was born to decorate your home'을 디지털 부호를 응용한 격자무늬로 표현했다. '생존하고 싶다'는 절절한 목소리인 셈이다. 그리고 최근엔 'structure'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다. 고무줄이라는 가벼운 물질로 정신적 문제를 다룬 무거운 개념적 단어를 표현한다. 재료와 텍스트의 이질적인 만남이 흥미롭다.
김승현은 최근 40회 개인전을 마친 석용진을 '멘토'로 삼기 원했다. 한국화를 전공하던 시절, 2년쯤 석용진의 작업실에서 배운 적이 있다. 또 지난해 주례를 서주기도 했다. 김 씨에게 석 씨는 한 번씩 불쑥 찾아가곤 하는 선배이자 스승이다. 전업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의 속살을 들어봤다.
▶석=김승현 작가는 제 작업실에 이년쯤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개념미술로 방향을 선회했어요. 깜짝 놀랐죠. 나는 이 친구에게 개념미술의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 삶이 풍부해야 하고, 철학적 성찰을 많이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수많은 성찰을 통해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가져야 작품이 풍부해지지 않을까요.
▷김=네. 좋은 말씀이세요. 저는 2008년 대학 졸업 후 부산, 청주, 영천 레지던시를 다녔어요. 졸업 후에 패기로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는데, 이제 조금 지치네요. 지치게 하는 원인이 결국 돈 문제입니다. 돈을 우선시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나와 내 작품이 살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처음엔 사회적 이슈를 다루다가 허망한 느낌 때문에 '나'라는 주제로 돌아왔죠. 내가 사는 문제, 그리고 작품을 계속 할 수 있는지의 문제 말이죠.
▶석=미술로 먹고산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겁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컬렉터 층이 약했어요. 지금도 투기 가치로 그림을 생각하죠. 특히 기댈 곳 없는 젊은 작가는 힘들 수밖에 없어요.
▷김=생계를 위해 물류센터에서 일한 지 5개월쯤 됐어요. 저는 미술 관련 일로 돈 벌어서 작업하지는 말자고 결심했거든요. 많은 작가가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 미술 관련 기관이나 강사 등으로 활동하지만 그러면서 작업을 접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전혀 상관없이 돈을 벌고 작품하는 게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돈을 벌면서 작업을 할 수 있는, 안정적인 투잡이 제 꿈이에요. 너무 미술만 생각해서는 작업이 잘 안될 때가 많거든요. 세상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석=가장 중요한 것이 '삶'이에요. 예술은 그 아래 하위개념일 뿐이죠. 가끔 '예술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젊은 후배를 보지만, 과연 그럴까요. 삶보다 우선할 수는 없죠.
전업작가로 살아가다 보면 '발가락 끝이 짜릿짜릿'한 순간이 많아요. 외줄 타는 기분이랄까. 아직 우리나라 미술시장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획과 생산, 판매까지 본인이 다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온갖 혈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작품을 팔 때면, 울고 싶은 심정일 때도 있죠. 한 가장으로서 내색할 수는 없고. 작품을 떠맡기듯 팔아야 할 때면 비참한 심정이죠.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예술가의 길을 가는 것은, 우리 선배들이 그러했듯 굶을 각오, 가족의 희생까지 각오하고 가야 합니다. 이왕 예술가로 시작했으니 나와 다른 사람의 욕구를 다 충족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선생님께 배우고 들으면서 삶에 대한 태도, 작업에 대한 태도를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더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다 보여주셨으니 믿음이 크죠.
▶석=요즘 예술가들은 좋은 표현으로 '차용', 나쁘게 보면 '도둑질'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런 데 반해 김승현 작가는 대학 다닐 때 아날로그 방식으로 꼭 해야 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작가라면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중요해요. 스스로의 길을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죠. 개인적으로 나 자신은 남이 간 길은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것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김승현 작가도 남과 다른 이야기, 개념미술이라는 점이 좋아요.
하지만 개념미술 또한 현실적인 문제를 간과할 순 없죠. 예를 들면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 작품은 어떤가요. 개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재료, 크기, 등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충분히 고가의 예술작품이 되기도 하는 것이 또 현대미술이죠.
재료에 대한 인식, 작품 크기에 대한 문제, 장식성 여부 등을 다양하게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김=작업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요. 누군가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지 묻곤 해요. 제일 중요한 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 거대한 대중문화가 만들어내는 화려하고 현란한 메시지에 비하면 작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서 이끄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미술의 경우, 표면은 다양하지만 그 속내는 똑같아요. 겉만 다를 뿐이죠. '나는 그렇게 하지 말자'는 생각을 많이 해요. 겉과 속이 같았으면 좋겠어요. 균질한 평면을 보여주고 싶어요.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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