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미루는 습관

저는 오늘 일을 내일로 잘 미루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된통 혼난 적도 많았지요. 제가 종합병원에 근무하던 때였습니다. 학회에서 성형외과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발표할 엄청난 양의 슬라이드를 만들어야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발표 하루 전날 자료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응급수술이 생겨서 수술 마치고 밤새도록 강의 자료를 만들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발표가 훌륭할 수는 없었겠죠. 미리미리 준비했으면 강의를 잘했을 텐데요.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겁니다.

이런 것을 심리학에서는 '미루는 버릇'(Procrastination)이라고 하더군요. 시험공부, 제출해야 하는 서류, 더 늦기 전에 가야 할 치과,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기, 다이어트 등 우리가 평소에 오늘 당장 시작하지 못하는 일의 종류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매우 중요한 것까지 다양합니다. 심리학에서는 15~20% 정도의 인구 비율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건강 심리학자 닐 피오넬 교수는 미루는 습관의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는 두려움으로 말미암은 회피, 둘째는 구체적이지 않은 목표, 셋째는 위기에서 발휘되는 능력에 대한 비합리적인 믿음. 저의 경우는 3번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지금 이 칼럼도 마감 시간 24시간 전에 저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면서 쓰고 있거든요) 문제는 이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미룬 일에 신경 쓰느라 놀아도 노는 것이 아니고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스트레스로 심혈관계 질환, 위장 질환과 같은 건강 악화로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제가 요즘 읽는 책 '넛지'(Nudge)에서 해결책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비합리성으로 내린 안타까운 결정을 적절한 선택으로 바꾸게 하는 부드러운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머의 '오디세이'를 보면 세이렌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바다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선원들을 유혹해 바다에 빠뜨리거나 배가 난파당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이는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몸을 밧줄로 돛대에 묶어 그 해안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넛지는 바로 세이렌의 유혹에 넘어가지 못하게 막아준 밀랍과 밧줄이었던 것이지요.

또 다른 예는 미국의 '크리스마스 적금 계좌'라는 상품입니다. 이자율이 매우 낮고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절대로 찾지도 못하는, 너무나 불리한 계약인데도 미국에서는 히트 상품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계좌에서 돈을 찾을 수 있다면 크리스마스에 선물 살 돈 없는 빈털터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의지에 제약을 가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돈이 바로 크리스마스 적금 상품의 매력이고 넛지인 것입니다.

자기 통제의 여러 가지 문제의 근본은 간단하게 두 개의 자아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두 개의 자아는 원시안적인 '계획하는 자아'와 근시안적인 '행동하는 자아'입니다. '계획하는 자아'는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나에게 최상의 선택을 하도록 하고 '행동하는 자아'는 눈앞의 유혹에 약합니다. 만약 월요일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긴다면 '계획하는 자아'를 따르면 일주일 계획으로 차근차근 일을 해나가도록 배분'설계하고, '행동하는 자아'를 따르면 월요일에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텔레비전 보기, 친구와 술 한잔하기 등의 유혹에 약해져 주말로 일을 미루게 되지만 막상 주말이 되면 여러 가지 행사가 겹쳐 과제를 해결해낼 수 없게 되지요. 신경경제학 분야에서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자기통제와 관련하여 이런 이중 시스템적 개념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들은 재밌는 유혹에 빠져 뒷전으로 팽개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유혹에 빠지지 않게 설계할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칼럼을 월요일 아침까지 내야 하는데 항상 그 전주 주말에 밤을 지새우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저를 위한 넛지는 없을까요?

홍용택/성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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