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칼로 일어선 자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은 거침없는 위트와 풍자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선생이 기독교 대표로 일본 시찰을 갔을 때의 일이다, 일본 정부는 거대한 병기창을 보여주고는 환영회까지 열어주었다. 조선 대표단들에게 일본의 압도적인 국력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지고한 경지를 보여준다. "오늘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병기창을 보았더니 무수한 대포며 갖가지 총기가 있어 과연 일본이 세계의 강국임을 알게 되었소. 다만, 성서(聖書)에 이르길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걱정이오."

일제의 패망을 예언한 이상재 선생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은 역사적 진리다. 사마천은 2천여 년 전에 사기(史記)에서 '호전적인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고 썼을 만큼 전쟁의 무용성을 꿰뚫어봤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의 전쟁을 지켜보면 옛 경구가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민간인 수천 명을 죽이고 다치게 하는 '대량 살상'을 자행하면서 국제적인 고립과 비난을 자초했고, 결국에는 '비도덕적이고 추악한 국가'로 낙인찍혔다는 느낌이 든다. 히틀러에 의해 수백만 명이 학살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지만, 이제는 다른 민족을 탄압하고 학살하는, 지독한 가해자로 군림하고 있는 걸 보면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속담에 '모진 시집살이를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더 구박한다'는 것과 유사한 상황인 듯하다.

이스라엘에 의해 암살된 하마스 창설자 아메드 야신(1936~2004)의 말이 기억난다. "나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모든 사람들은 전쟁과 유혈사태를 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외국 군대가 침략해 영토를 강점하고 사람을 죽이고 쫓아내는 판에도 '관용'을 요구하는 일이 과연 온당할까?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던 시절을 돌아보자.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순결한 독립투쟁의 역사를 테러리스트나 극단주의자들의 난동으로 불렀는가?"

일본이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른 것을 보면 야신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폭력이 자행될수록 보복의 악순환만 계속될 뿐이다. 평화공존은 힘들고 인내가 필요한 길이지만, 그것만이 서로 살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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