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음반 읽어주는 남자] 양희은-1991

굳이 수식하는 시대다. 특히 장사에서 제품에다 많이 붙인다. 정품이 아니라 짝퉁인데 '세미'(semi'준하는)라거나 비슷한 'st'(style, 스타일)라는 식이다. 크기는 작아졌는데 값은 오히려 비싸졌다고 지적하면, 앙증맞은 '미니'(mini)라서 그렇다고 한다. 소비자의 필요에 맞춰 낱개로 팔지 않고 크게 한탕 팔아치우려는 속셈을 비난하면, 실속 있는 '점보'(jumbo'거대한 것)라고 둘러댄다. 요즘 장사의 밑천은 잘 만든 제품이 아니라 잘 갖다 붙이는 수식어가 아닐까. 장사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식어라도 만들어 포장지로 쓸 수 있다. '포장 명사'의 시대다.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칼럼 '나쁜 명사'(2006, '씨네21' 581호)에서 단어를 소유한 기득권이 잘못된 수식으로 나쁜 명사를 만드는 행태를 꼬집었다. 예컨대 노사분규 현장에 경찰을 투입하는 '경찰력 투입'을 '공권력 투입'이라고 쓴다. 단순한 물리적 힘을 뜻하는 경찰력에 공적인 정당성을 가미하는 수식이다. 또 돈 좀 있고 자리 높고 발언권이 있어 누군가의 처지를 좌우할 수 있는 '사회지배층'을 '사회지도층'이라고 미화한다. 남 교수는 "단순한 정치'경제적 사실을 미학적 가치로 날치기 통과시키는 표현"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들은 앨범이 있다. 양희은이 마흔의 나이에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1991(1991)이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로 유명한 이 앨범은 양희은의 노래와 전체 작'편곡을 맡은 이병우의 클래식기타 연주로 소박하게 만들어졌다. 모두 8곡.

이제는 전설이 된 포크 듀오 '어떤 날' 출신이고,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악대 클래식기타과를 수석 졸업했으며, '왕의 남자' '괴물' '마더' 등 흥행한 영화의 OST 프로듀서로도 활동한 이병우의 이력에 대한 설명은 과도한 수식일까. 오히려 이 앨범의 수준과 방향성을 알려주는 명징한 정보다.

화려한 주법 없이 솔직담백하게 흐르는 이병우의 클래식기타 연주에, 양희은이 덤덤하면서도 풍부한 보컬을 얹었고, 이를 세계적인 음악 프로듀서 제랄 벤자민이 편안한 분위기로 들리도록 조율했다. 노랫말을 보면, 가을과 겨울의 청명하고도 쓸쓸한 정서를, 분주하거나 때로는 한가하며 햇살로 가득하다가도 이내 서늘해지는 공기에 손을 비비는 일상 속 풍경을, 입으로 말하듯 담아낸 에세이다. 또 후렴구를 강조하거나, 갑작스러운 도입'반전'종결을 구사하지도 않는다. 앨범명도 같은 맥락에 있다. 무엇이 어떠했던 1991년이 아니라, 단지 노래를 만들고 녹음했던 때가 1991년이라는 표기다.

굳이 수식하지 않는다. 실은 양희은과 이병우가 함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수식은 사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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