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민의 인격모독에 시달리다가 분신을 시도했던 서울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경비원 A(53) 씨가 한 달간 치료를 받다가 이달 7일 끝내 숨졌다. 동료 경비원들에 따르면 A씨가 평소 한 70대 여성 입주민에게 모욕적인 말을 자주 들어왔고 이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상당수 아파트 경비노동자들이 저임금'고용불안 구조 속에 입주민으로부터 언어폭력 등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거나 잡무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우리는 '을'도 아니고 '병'이다"고 절규한다.
◆부당 대우받아도 따지지 못해
대구 달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3년째 경비 업무를 하는 신모(65) 씨는 최근 '경비노동자의 분신 사건' 뉴스를 접하고 눈물을 훔쳤다. 십분 공감했기 때문이다. 신 씨 또한 입주민들의 부당한 요구에 화가 날 때도 많지만 '주민에게 밉보여 좋을 것 없다'는 생각에 울분을 삭이고 있다. 형광등을 교체해달라, 집까지 택배물건을 옮겨달라. 애완견을 찾아달라 등 주민들의 요구는 끝이 없다.
지난해 여름 새벽, 아파트에 잠시 정전이 됐을 때 주민 10여 명이 경비실로 몰려와 "빨리 전기를 고쳐놔라"고 고함을 쳤다. "우리 아파트만 아니고 이 일대가 전부 정전인데 어쩌겠느냐"고 말을 했지만 주민들은 막무가내였다. 신 씨는 "하루는 한 어린이가 주차된 차의 유리를 깬 적이 있다. 상황을 수습하고자 그 아이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아이 어머니가 달려와 주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신이 뭔데 내 아이한테 입을 대느냐'고 따졌다"고 하소연했다.
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경비노동자 장모(70) 씨도 자존심 상할 때가 한두 번 아니다. 경비원 경력이 10년 넘는다는 그는 "과거보다 시민의식이 많이 성숙했지만, 경비 업무를 하면 할수록 힘들다. 엄연히 경비노동자에게도 휴식시간이 있다. 겨우 틈을 내 눈이라도 붙이면 '수시로 누워 잠만 잔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이뿐 아니다. 장 씨는 밤만 되면 술을 마시고 화풀이를 하는 주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따지고 싶지만, 일자리를 잃을까 봐 그러지도 못한다. 그냥 욕설을 듣거나 자리를 피한다. 한 번은 혼자 관리사무소를 지키고 있는데 주민이 폭력을 휘둘러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다. 장 씨는 "그 주민이 경찰서에서 돌아오더니 다짜고짜 자신이 내야 할 벌금을 대신 내라고 소리를 지르더라.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처럼 60대 후반만 되면 경비업체가 채용을 꺼린다. 이 나이에 110만원 정도 월급을 받으며 일할 곳을 찾기는 어렵다"고 했다.
경비업계 관계자는 "원래 경비업법상 경비노동자는 경비나 보안 외에 다른 업무를 하지 않도록 돼 있다. 하지만 경비노동자들은 계약해지 등 불이익을 우려해 잡무를 거부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저임금 100% 적용되면 고용불안?
경비노동자들에겐 최저임금 적용이 오히려 불안요인이 되고 있다. 내년부터 아파트 경비노동자를 비롯한 감시'단속직 근로자들은 최저임금 100%를 적용받는다. 유예기간인 올 연말까지는 감시'단속직 근로자는 최저임금(2014년 시급 5천210원)의 90%를 시급으로 받고 있다. 24시간 맞교대로 근무하는 경비노동자의 월 급여는 현재 100만~150만원 정도이다. 그러나 내년부터 최저임금이 100% 보장되면 지금보다 임금이 10만~20만원 정도 오른다. 이는 경비노동자들이 환영할 일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파트 주민들이 관리비 부담을 우려해 인력을 줄이거나 무인경비 시스템을 도입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경비노동자 김모(63) 씨는 요즘 고용 불안으로 잠을 설치는 날이 많다. 자신이 소속된 경비업체가 내년 초쯤 현재 인원의 절반을 줄이는 구조조정에 들어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당수 아파트들이 인력 감축을 위한 주민 여론 조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김 씨는 "나이순으로 계약 해지를 할 가능성이 높아 걱정이다. 주민과 갈등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계약해지 1순위이기 때문에 요즘 들어서는 더욱 숨죽이며 일하고 있다"고 했다.
신세은 한국경비협회 대구경북지방협회 사무국장은 "주민들은 젊은 경비노동자를 선호한다. 55세 이상의 경비노동자는 배치하지 말라고 경비업체에 요구하는 곳도 많다. 최저임금 100%가 적용되면 고령의 경비노동자는 그만큼 설 자리가 없게 된다"고 했다.
◆고용 불안 해소에 사회적 관심 둬야
이처럼 경비노동자의 열악한 처지는 비정상적인 고용형태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입주민들로부터 노동의 대가를 직접 받는 게 아니라, 용역회사에 소속된 간접고용 노동자이다. 그만큼 자신의 권리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처지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경비노동자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가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세은 사무국장은 "청원경찰의 경우 법적 보호 장치가 있지만 이들의 업무를 대신하는 경비직에 대해서는 보호할 법이 따로 없다. 여기에는 정부의 무관심도 한몫하고 있다"고 했다.
간접고용 형태를 줄이기 위한 한 방법으로 협동조합 운영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모든 문제의 근원은 경비노동자의 고용 불안에 있다. 지방자치단체는 아파트 경비 협동조합 결성이 활성화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경비노동자의 고용 안정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이들에 대한 입주민의 대우도 달라질 수 있다. 광주 광산구의 경우 일부 경비노동자와 청소노동자가 자체적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데 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김 연구위원은 "아파트 경비노동자를 단순히 피고용자가 아닌 아파트의 일원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성숙한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등이 이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나 실천을 해야 한다"고 했다.
고용형태의 다단계 구조를 개선하면 아파트 입주민의 관리비 부담 증가 없이도 경비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적용이 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김순희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은 "무조건 관리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아파트 경비노동자 인력을 줄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인력을 줄이면 그만큼 경비 소홀 등 누수가 생기기 마련이다"며 "간접고용이 아닌 직접고용을 하면 용역업체에 지불하는 비용 등을 줄일 수 있어 최저임금 문제 등을 합리적으로 풀 수 있다"고 했다.
전창훈 기자 apolonj@msnet.co.kr
허현정 기자 hhj224@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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