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섬유 산증인 5명 여성
#역사책에 없는 경험담 생생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또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1980년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불렀던 '사계'란 곡은 바뀌는 계절조차 느낄 새 없이 입에 풀칠하기 위해 미싱을 돌렸던 우리 누이동생들의 가슴 아픈 시대상을 담아낸 운동가요였다. 이 노래 가사처럼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당시 수많은 여성이 실밥 먹어가며 비정하게 돌아가는 미싱기에서 청춘을 바쳐야 했다.
이것은 '섬유'로 도시 발전의 기반을 확립한 대구도 예외가 아니다. 대구의 섬유 이야기 속에는 그 힘든 시대를 살아갔던 여성들의 사연이 수없이 녹아 있다. 이번 (재)대구여성가족재단이 발간한 '대구, 섬유 그리고 여성'은 이런 지역 여성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은 기록물이다. 대구여성생애구술사 1편이다.
◆구술을 통해 여성의 역사를 담다
그동안 역사는 남성 엘리트의 경험에 대한 기록으로 인식돼 왔다. 여성의 경험은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침묵' 혹은 '배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여성의 경험을 역사 속으로 불러오기 위한 연구방법의 하나로 197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에서 '여성구술사'가 새롭게 등장했다. 그동안 역사 서술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로 역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재)대구여성가족재단은 지역 여성사를 조명하는 한 방법으로 구술사를 선택했고, 2014년 구술 연구의 키워드를 '섬유'로 축약했다.
이 책에는 총 여성 5인의 구술이 펼쳐진다. 대구경북 지역 견직물 산업의 핵심 원료인 원잠종을 육성해 경북도청에 납품하던 '나방이 공장' 칠성산업사의 맏며느리로 살아온 정말분(83) 구술자는 지금도 일제강점기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가옥에 살고 있다. 1932년 동인동에서 출생했고 일제강점기와 해방, 10월 항쟁, 6·25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 당시 개인적 경험을 들려준다. 해방 무렵 시아버지가 일본총독부 직원으로부터 잠종사업을 인수하게 된 상황과, 칠성산업사로 시집온 후 지역 섬유산업이 한창 번창하던 시기 맏며느리로서 집안 식구들과 200여 명 공장 직원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낸다. 특히 희도초등학교 재학 당시 달성공원 신사에 도장 찍으러 다니던 기억, 미나까이 백화점에서 근무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대구의 살아 있는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김상태(77) 구술자는 의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구의 면방직공장에서 평생을 보냈다. 남들이 가르쳐주지 않는 어려운 직조 관련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워 '통경사'라는 숙련노동자로 살아왔다. 시집와서 평생 비산동에서 살면서 달서천에 빨래하러 가던 기억, 달성공원 뒤 샘에서 물을 길어 먹던 기억 등이 생생하다. 숙련노동자로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류병선(75) 영도벨벳 회장은 남편과 함께 회사를 설립하고 고급 벨벳 제품개발에 성공한 CEO로서 대구 섬유의 역사를 들려준다. 어릴 적 6·25전쟁을 겪으면서 피란을 다녔던 이야기 등은 섬유뿐만 아니라 대구의 역사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28년간 제직공장에서 근무한 남두연(61) 구술자의 이야기는 당시 14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일해야 했던 청소년 노동자의 일상을 들려준다. 고향 밀양에서 결혼한 오빠를 따라 대구로 나오면서 제직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야근하는 것이 힘들어 지금은 대학교 청소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남두연 구술자는 특히 야간 근무를 힘든 기억으로 꼽고 있다.
여계연(76) 구술자는 서문시장 1지구에서 원단장사로 시작해 지금은 천연염색옷을 판매하고 있다. 1980년대에 시작한 서문시장 원단 장사로서의 삶은 대구 섬유공장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특히 원단장사를 하기 전 시민운동장 매점을 운영해 큰돈을 만졌던 기억이 흥미롭다. 1967년부터 매점을 운영해온 여계연 구술자를 통해 대구 시민운동장의 역사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새롭게 재조명하는 대구의 기억
이 책에는 흥미롭게도 대구 역사에 대한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도 있다. 대구에는 해방 직후 1945년 9월 30일, 대구방직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설비의 절반이 불에 타버렸다. 당시 대구 시민은 이 화재가 '왜인의 최후 발악으로' 일본인 혹은 일본군이 불을 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기억으로 이정희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는 당시 대구방직공장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오카다 겐지가 귀국 후 사내에 보고한 수기를 입수해 일부를 번역해 기록하고 있다. 이 수기는 이정희 교수가 오카다 씨의 딸과 친구관계인 야마모토 공장장의 장녀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한편 이 사건에 대해 정말분 구술자는 비교적 정확한 기억을 구술했다. 불 타기 전 공장을 구경한 적이 있고 불을 낸 일본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정말분 구술자의 기억은 오카다 겐지의 수기와 달라 흥미롭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수반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같은 사건을 두고 각각 다른 기억을 떠올리는 두 사람의 역사적 기억의 조우를 목격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다양한 전문가들의 글을 통해 대구 여성의 기억뿐만 아니라 대구 근현대 섬유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미원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는 "역사책에서, 여성사전시관에서 볼 수 없는 지역 여성의 역사를 찾기 위한 소박한 출발이 필요했다"면서 "모두의 관심과 노력으로 탄생한 대구여성 생애 구술사는 1편 이후에도 의미 있는 작업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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