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봉에서 눈 산행을? 처음 산행 계획을 들었을 때 약간의 혼돈이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 남원, 운봉 지역은 위도상 상고대나 상쾌한 설원을 보기 힘들 거라는 회의감이 첫째였고 둘째는 몇 해 전 바래봉에서의 화려했던 철쭉의 기억이 눈(雪)으로 대치되는 데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었다. 솔직히 바래봉은 많은 산객들의 의식 속에 '철쭉 명산'으로 너무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한편으로 호기심도 일었다. 산사 면을 온통 붉게 물들였던 철쭉의 향연이 끝난 자리에 무채색의 적막이 그 공간을 채웠을 때 그 느낌은 어떨까 하는. 또 그 자리서 그 핑크빛 기억을 재생(再生)시킬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까지. 연분홍의 화려한 추억이 머무르고 있는 바래봉 순백의 설원으로 떠나보자.
◆지리산 최북단 능선의 중심 바래봉
아웃도어 업체 밀레 주최 '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가 열리는 남원시 운봉 주차장엔 15일에도 전국에서 1천1백여 명의 산꾼들이 몰려들었다. 산행에 앞서 스트레칭을 하는 중 다급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행사장으로 오기 위해 남원으로 오던 엄홍길 대장이 깜빡 남원역을 지나쳤다는 소식이었다. "'산 위'에서 한 치의 오차,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 분도 '산 밑'에서 어쩔 수 없군" 엄 대장의 어이없는 해프닝에 참가자들은 그냥 재미있어했다. 엄 대장은 순천에서 다시 남원행 KTX를 타고 오는 중이라 먼저 산행에 나서기로 했다.
주차장에서 정상 쪽을 올려다보니 흐릿한 눈발 사이에서 둥근 봉우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래봉이었다. 스님들 공양그릇인 발우(鉢盂)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 해서 이 이름을 얻어 달았다.
만복대-고리봉-부운치로 이어지는 바래봉 능선은 성삼재에서 직각으로 길을 열어 북쪽으로 산길을 이어간다. 최고의 건각(健脚)들만 달려든다는 '지리산 태극종주'에서 산청과 남원을 잇는 최북단 코스다.
◆산 중턱에 '화이트 트리' 군락 장관
모처럼 아이젠을 장착하고 산행길로 접어들었다. 올 들어 첫 개시(開始)고 몇 년 새 아이젠을 꺼낸 기억이 드물다. 요즘 들어 강설량이 줄어들었다는 방증이다.
30분쯤 고도를 높이자 남원 운봉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름에서 보듯 운봉(雲峰)은 해발 300m급 고원 상의 분지다. 정감록 비결에 승지(勝地) 중 하나고 고려 말 왜구가 극성을 부릴 때 이성계가 대첩을 거둔 '운봉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중턱쯤 이르면서 눈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낙엽송이며 가지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화이트 트리'를 꾸며 내며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설경을 대하는 남녀의 감상 태도는 너무 다른 것 같다. 여성들이 들뜬 고음으로 감탄사를 날리는 반면 남성들은 담담한 관조로 일관하며 감정을 숨기는 편이다. 여성들의 스마트폰에 담긴 설경은 아마 오늘 밤 카톡이나 밴드를 옮겨 다닐 것이다.
◆옛 철쭉 능선엔 적막한 설경만
편안한 임도를 4㎞쯤 걷다 보면 갈림길과 만난다. 바래봉 삼거리다.
이미 고도는 1,000m를 넘어서고 산 밑과 기온 차는 5, 6도에 이른다. 뚝 떨어진 수은주는 본격적으로 상고대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덕유산, 태백산처럼 주목 군락은 보이지 않았지만 낙엽송, 구상나무에 달라붙은 상고대도 설경을 연출하기에 충분했다. 상고대와 환상 조합인 코발트색 하늘빛이 운무에 가려진 것은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칼바람을 헤치고 드디어 바래봉 정상에 섰다. 운무의 심술은 정상까지 따라붙으며 지리산 조망을 막아 버렸다.
정상의 설경을 카메라에 담다가 문득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10년 전쯤 바래봉 산행 때 온통 철쭉으로 카펫을 이루던 이곳 풍경이었다. 당시 능선마다 군락을 이룬 철쭉은 말 그대로 '꽃 산 꽃 해'였다. 당시 정상 데크에는 수만 인파가 몰려들어 교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잠시 철쭉 추억에 젖어 있을 무렵 중절모 패션의 한 등산객이 산사 면을 허겁지겁 오르고 있었다. 엄 대장이었다. 1시간을 지각한 엄 대장은 참가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거의 산악 마라톤 수준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얼마 전 오지학교 건설을 위해 네팔에 다녀왔고 각종 강연요청, 원고 청탁에 정신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영화 '히말라야'를 성원해준 대구경북 독자들에 대한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엄 대장과 출연진들은 영화 촬영 전에 대구경북 유족들을 만나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영화가 지역민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으니 또 한 번 위로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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