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정에서 있을 수 없는 친박 연대
쇠망의 길 걸은 신라 골품제도와 비슷
권력에 기대어 국회의원 하겠다니
이 나라 민주주의 수준이 이 정도인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수준 낮은 사람이 완장을 차려 한다." 김 대표의 말처럼 완장은 본래 힘 있는 자가 차는 게 아니다. 권력자의 이름을 팔아 위세를 부리며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건달들이 찬다. 그런데도 이 정부 들어 지금까지 완장 타령이 계속되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이명박정부 5년간 신물 나게 들은 말이 '친이'와 '친박'이란 단어였다. 친이는 곧 권력을 뜻했고 친박은 처음엔 핍박받는 반대편이었다. 17대 대선 직후 18대 총선에서 당장 '친박 학살'이란 말이 나왔다. 당시만 하더라도 좌장으로 불리던 김무성 의원이 학살명단에 포함됐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은 강했다. '살아 돌아오라'는 말 한마디로 사지에 빠졌던 자파 의원들을 회생(回生)시켰다. 성숙한 민주정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특정정치인의 성을 딴 '친박연대'라는 정당이 그때 등장했다. 그러나 핍박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명박정부 절반이 지날쯤엔 친박은 이미 미래권력을 의미했다.
친박이 살아남아 권토중래(捲土重來)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세력이 공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는 YS, DJ 이후 콘크리트 같은 튼튼한 지지를 받고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었으니 누가 뭐래도 5년 동안 변함없이 차기권력 0순위였다. 그게 너도나도 다 친박이라고 나서게 만들었다. 누가 충성맹세를 했다느니, 누가 실세라는 말이 그때부터 떠돌았다.
이랬으니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은 한 지붕 두 가족이었다. 그들은 정책이나 노선으로 싸우지 않고 친이 친박으로 싸웠다. 마치 주군을 위해 싸우는 봉건시대 무사처럼 말이다. 어쨌든 박근혜정부는 탄생했고 이번엔 친박이 권력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그러자 비대해진 친박도 분화하기 시작했다. 새로 신임을 얻은 이를 신박이라 하니 원조 친박을 원박이라 불렀다. 비박에서 친박으로 변신한 이는 월박으로, 대통령의 신임을 잃은 이는 짤박이 됐다. 친박에서 떨어져 나간 탈박이 나오더니만 돌아온 친박이란 의미로 복박도 등장했다.
이 해괴한 '작명'은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함께한다거나 정책을 지지한다는 데서 붙여진 게 아니라 대통령의 신뢰와 친소(親疏)로 인한 것이다. 말하자면 '친박'이란 명칭 자체가 이른바 '완장'인 셈이다.
이제 친박은 일종의 골품제도처럼 작용한다. 그만큼 노골적이다. 순혈주의(純血主義)의 신라에서 6두품은 '아찬'까지밖에 오를 수 없었다. 이벌찬'이찬 같은 고위직을 독점했던 진골은 옷 색깔부터 달랐다. 신라는 최치원(崔致遠) 같은 현자를 절망에 빠뜨렸던 나라였다. 결국 순혈주의와 골품제도는 천년왕국을 만들었지만 널리 인재를 얻지 못해 쇠망의 길을 걸었다.
말하자면 지금 '친박'이 딱 그 짝이다. 집권여당의 여섯 예비후보가 모여 '반격의 서막'이란 보도자료를 내고 '진박'이란 말이 돌았을 때 그저 선거판에서 대통령 이름을 파는 정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친박의 새 좌장이라는 최경환 의원이 이른바 진박 후보의 선거사무소 개소식에서 "진박 후보들이 박 대통령을 돕겠다고 나온 것인데, 코미디하듯 조롱하면 되겠느냐"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친박 좌장이 '진박'을 공인하고 나선 것이다.
최 의원은 같은 당 의원들인 현역 의원들을 "야당이 대선에 불복하고 댓글 사건으로 흔들어댈 때 대구 의원들은 어디 갔었나?"면서 싸잡아 비난했다. 최 의원에겐 국회의원은 그저 대통령의 호위대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최 의원이 모르는 게 있다. 조롱은 국민이 진박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진박들이 국민을 조롱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진짜 친박인 '진박'이라고 대통령 이름을 팔아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것이야말로 국민을 그저 종으로 아는 조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쨌든 보도를 보면 진박 마케팅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박타령' 노래가 돌고 그 노랫말에 진박이 '잡박'으로 불린 것이다. 하긴 어찌 보면 모든 권력이나 직책은 한낱 완장에 불과할지 모른다.
국회의원이든 그 무엇이든 어차피 공복(公僕)인데도 그게 권력으로 보인다면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 완장 차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나라 민주주의 수준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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