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설
제법 높은 산이 동서로 병풍처럼 가리고 있는 그 양지쪽에 내 고향 마을이 있다. 이 마을 뒤로 한참 올라가면 윗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당숙 두 분이 사셨다. 해마다 설날 아침이면 이곳을 제일 먼저 찾았다.
산골짜기에서 몰아치는 매서운 칼바람을 안고, 양말도 장갑도 귀마개도 없이 십여 분 가노라면 귀가 아프고, 손가락 발가락이 아프고, 코는 빨갛다 못해 파란색으로 변했다. 코에서 흘러내린 걸 옷소매로 문질러 닦았으니 그게 얼어붙어서 옷소매는 뻔질뻔질했다.
이런 꼴로 들어온 애들을 당숙모님은 '얼른 여기다 손을 넣어라' 하시면서 아랫목에 이불을 펴 주셨다. 따뜻한 이불 밑으로 손을 넣자 아프기 시작한다. 얼어서 감각도 없던 손이 녹으면서 아픔을 느끼게 된 것이다. 눈물을 질금거리며 그냥 참는 아이도 있고, '엉엉' 큰 소리로 우는 아이도 있었다.
겨우 언 몸을 녹인 다음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차례를 지냈다. 너무 어렵던 시절이라 세뱃돈이라는 건 아예 몰랐다. 차례가 끝나면 떡국을 반 그릇씩 받는다. 거무스레한 피 떡국이었다. 그 속에 흰 쌀떡은 서너 개씩 섞여 있었다. 그 쌀떡은 마치 연못에 드문드문 핀 하얀 연꽃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와아! 내 건 쌀떡이 다섯 개다."
한 아이가 좋아하며 자랑하자 두 개나 세 개밖에 들어 있지 않은 아이는 부러운 듯 바라본다. 욕심이 많은 아이는 형에게 바꿔 먹자고 떼를 쓰기도 하고, 마음씨 착한 언니는 미리 동생에게 흰떡을 건져 주기도 한다.
피떡은 색깔부터 곱지 않은 데다 맛도 약간 씁쓰레하면서 까칠까칠했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후후 불면서 맛있게 먹었다. 변변한 설빔도 입지 못했고, 새 신발도 신지 못했다. 또 지금처럼 유과나 강정, 고기나 생선, 적도 없는 설이었지만 한 달 전부터 이 설날을 손가락 꼽아가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낙동강이 마을 가까이로 흐르는 나의 고향은 해마다 홍수와 가뭄으로 농사를 망쳤다. 한창 자라는 벼논에 강물이 범람하여 벼가 사나흘 물속에 잠기면 다 죽고 만다. 그 논에 다시 피 씨를 뿌리고, 밭에는 조나 메밀을 심었다. 때가 늦었지만 그 피와 메밀들은 서둘러 자라 조금씩이나마 먹을거리를 맺어 주었다. 물에 잠기지 않은 논도 있었지만 이건 또 하늘의 비만 쳐다보는 천수답이라 가뭄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쌀보다 피나 조, 메밀과 보리로 기나긴 겨울을 나고, 높디높은 보릿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집에서는 겨우 밤톨만 한 풋감 떨어진 걸 주워서 보리쌀 씻은 뜨물에 담가 두었다가 먹었고, 산과 들로 나가서는 잔디 뿌리, 띠의 새순인 삘기, 보리밭에서 생기는 깜부기 등을 뽑아 먹으며 허기를 견뎠다.
"동무, 동무 내 동무. 보리가 나도록 살자."
너무나 슬픈 노래였지만 뜻도 모른 채, 함께 부르며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 왔다. 그리 멀지도 않은 50, 60년 전 이야기다.
지금은 주먹만 한 감이 빨갛게 익어 길옆에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하얀 쌀 떡국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뿐인가. 아파트나 빌라 앞을 지나다 보면 감자, 고구마, 감귤, 심지어 하얀 쌀까지 큼직한 봉지나 박스째로 버려진 걸 흔히 본다. 무슨 흠이 있어 버렸을까? 궁금해서 살펴보니 껍질이 조금 상한 감귤이나 싹이 좀 난 감자였고, 쌀에는 벌레가 생긴 흔적이 있었다. 또 잔치나 여러 행사장에서 남은 음식들, 더러는 손도 대지 않은 걸 그냥 쓰레기통에 버린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먹는 것을 아까워할 줄 모르고 함부로 버리게 되었을까.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비가 온 뒤 진흙의 장마당에서 뻥튀기 기계에서 튕겨 나온 쌀 튀밥이 진흙 위에 떨어진 걸 주워 먹는 아이를 봤다. 멀리 아프리카의 빈민촌이 아니고 바로 우리나라 북쪽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내가 어릴 때처럼 장갑도 모자도 없이 추위에 떨면서 쌀 떡국 대신 옥수수 가루로 만든 죽을 먹으며 설날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내 어릴 적 피 떡국 먹던 설날과 진흙에 떨어진 쌀 튀밥 주워 먹는 북쪽 어린이와 마구 버려지는 먹거리들이 번갈아 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곽종상(대구시 남구 큰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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