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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護國)의 메아리<6>-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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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평양의 시청 옥상에는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는 시가지를 거쳐 넓은 벌판이 펼쳐있는 용흥리(龍興里)로 가서 군장을 풀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먹게 되니 이러한 낙원이 있는가 싶었다. 주둔한지 3일째인 저녘, 어둠이 짙은 철야에 비상이 걸려 전차중대와 합류했다. 전차에 올라탄 우리는 시속 100㎞의 속력으로 달리는 전차와 함께 북으로 진격했다."

지동리를 지나 넓은 들판을 달리는 전차대는 의기가 충천해 있었다. 간혹 적들이 사격을 해도 개의치 않고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때로는 투항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아예 인민군복을 벗고 사복을 한 채 만세를 부르며 다가오는 자도 있었다. 모두 해산해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하며 걸어가는 패잔병들도 많았다. 도로변에 들어선 주민들은 만세를 불러가며 환영일색이었다. 전차는 '어서가자 평양(Hurry up pyungyang)'을 외치고, 나도 '우리도 같다(We are Same to)'를 외쳤다. 평양이 가까워질수록 주민들의 환영열기는 고조되어 갔다. "국군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열창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미군들은 '감사합니다(Thank you)'를 연발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동평양의 대동교 옆까지 진격하여 시가전에 돌입했다. 동평양의 모습은 서울 영등포와 비슷해 보였다. 수색전을 전개했다. 여기서 우리는 적군의 패잔병을 잡기보다 평양의 적 치하에서 숨어 지하운동을 해온 동포를, 여러 사람 찾아내었다. 지하에 숨어 지내면서도 태극기를 품에 안고 지냈던 이 운동가의 열의를 보아가며 대동강 안으로 진격했다. 대동강에 도착한 우리는 강안에 배치되어 개인의 산병호를 파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산병호 작업이 끝나고 사주경계에 들어갔다. 평양시민에게 대민방송을 시작했다. "친애하는 평양시민 여러분, 이제 대한민국 국군이 여러분을 지켜드릴 것입니다."

방송이 20분간 계속되고 있을 때 어느 대위가 마이크를 빼앗아 들고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평양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15년전 이 곳 평양을 떠나 대한민국 군인이 된 사람입니다. 이제 평양에 돌아와 보니 옛날 추억이 새로워집니다. 추억을 살려 노래 한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는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대동강 기슭에 보트를 저으며

그대와 속삭인 옛날이 그리워

능라도 기슭이냐 반월도이냐

대동강 옛추억이 다시금 새롭다

평양의 대동강

노래를 마친 대위는 홀연히 그 곳을 떠났다. 강 건너의 본평양은 만세소리와 총포성이 뒤섞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교대로 민가를 수색하여 잔병을 소탕했다. 손목시계를 하나씩 가지고 와 손목에 차는 병사가 있는가 하면 또 어느 병사는 설탕을 한 푸대 가지고 오기도 했다. 또 어느 병사는 양복점에 들려 양복지를 한가방 넣어서 오는 등 잠시의 풍요에 젖어보기도 했다.

저녁 식사는 동평양 시민들의 정성이 담긴 떡국으로 해결하고 본평양 진격준비를 했다. 본평양의 시청 옥상에는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는 시가지를 거쳐 넓은 벌판이 펼쳐있는 용흥리(龍興里)로 가서 군장을 풀었다. 평양시민의 위문품이 전달되었다. 한말 가량의 소주가 우리 소대에 배정되어 전 장병이 즐겁게 마셨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는 내 분량을 송일용에게 주었다. 그 이튿날은 떡국과 냉면이 배정되었다. 시내에 외출하면 시민들이 우리에게 떡국과 국수, 냉면 등을 골라 나누어 주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먹게 되니 이러한 낙원이 있는가 싶었다. 살아남았으니 이러한 즐거움도 가져본다는 자위 속에 눈물이 흘렀다. 주둔한지 3일째인 저녘, 어둠이 짙은 철야에 비상이 걸려 전차중대와 합류했다. 전차에 올라탄 우리는 시속 100㎞의 속력으로 달리는 전차와 함께 북으로 진격했다.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소리에 기가 죽었다. 더욱이 여기에온 중공군은 2차대전시 일본군과 싸우던 팔로군이란 말에 모두 놀랐다. 그렇게도 중공군의 참전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밤이 되면 들려오는 중공군의 피리소리가 처량했다. 우리들 모두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한 것이 다행이었으나 압록강을 목전에 두고 후퇴한 것이 못내 아쉬었다."

10. 운산(雲山)의 중공군

우리에게 비상 출동령이 내린 것은 10월 21일 늦은 밤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우리는 순천(順天)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로든(Tohn Growden) 전차대를 앞세우고 달렸으나 날이 밝아온 순천에서 전과는 예상과 달랐다. 목표한 미군의 포로는 구출하지 못했다.

운산에 진입한 것은 10월 23일이었다. 영변을 스쳐지날 때는 소월의 시가 생각났다. 주변의 산 언저리에는 소월의 시처럼 진달래 꽃나무가 무성했었다. 운산을 가까이 하고 있을때, 부대가 산개하려 할때 갑자기 앞에서 쏘는 포탄에 후미의 보급차가 맞아 불이 나고 말았다. 이것이 운산에서의 중공군 대접전 신호였다. 공격을 당한 미군은 즉각 공군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전차부대는 산개하여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0월 하순의 밤바람은 겨울을 연상케 했으나 그때까지 우리에게 동복은 지급되지 않았다. 나도 군 농구화의 밑바닥이 다 닳아 창이 나 있었다.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소리에 기가 죽었다. 더욱이 여기에온 중공군은 2차대전시 일본군과 싸우던 팔로군이란 말에 모두 놀랐다. 그렇게도 중공군의 참전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밤이 되면 들려오는 중공군의 피리소리가 처량했다.

무슨 신호인지 알수 없는 피리소리에 인근의 영국군 부대가 당하고 말았다. 우리에게 달려온 그들은 중공군의 피리소리 중 우리측 취침나팔 소리와 흡사한 것은 공격신호이고, 기상나팔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후퇴를 알리는 것이라 했다. 그말을 들은 때부터 중공군의 피리소리는 듣기가 싫어졌다. 진격이 중지된 우리의 보급도 끊겼다. 식료품도 문제이지만 적의 공격에 대적할 군수품마저 없었다. 세 끼니를 굶은 우리들은 분대별로 식물 구하기에 나섰다.

그때 서울서 온 김성회가 대검으로 논에 있는 벼를 베어 훑어 동리의 연자방아에 찧어 먹자는 제안을 했다. 분대장은 모두 벼를 베어오도록 지시했다. 모두 대검을 들고 논으로 가서 벼 한단씩을 베어 와서 훑었다. 연자방아는 소나 말이 끄는데 우리가 3인씩 교대로 끌어 밥을 지었다. 색이 누렇기는 했지만 그래도 맛이 있었다. 중대장과 소대장에게 한 그릇씩 드리고 맛있게 한끼를 먹고 나니 앞이 환하게 밝아왔다.

우리는 인근의 미군은 어떤가 궁금해 가보았다. 나는 가장 친근하게 지내는 덮(Dup Wellam)을 찾았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덮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물어왔다. 나는 들판의 벼를 베어 밥을 지어 먹었다고 했다. 미군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를 물었더니 덮은 굶을 판이라 했다. 나는 덮을 대리고 옆 작은 마을로 갔다. 덮은 옆에 담아놓은 옥수수 까놓은 것을 재빨리 집어서 먹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아, 미군들은 옥수수를 잘 먹는구나' 싶어서 옥수수를 구해와 덮에게 주었다. 덮은 고맙다는 인사를 되풀이하면서 돌아갔다. 그후 2일이 지나니 운산의 하늘이 비좁을 정도로 미공군의 수송기가 날아와서 보급품을 투하했다. 붉고 푸르고 누른 낙하산에 매달려 떨어지는 보급품은 '레이션'과 전투에 쓰일 실탄과 포탄이었다. 보급품을 거두어 미군에게 인도하고 북진명령을 기다렸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기회 있는데로 수색전을 감행하면서 15일간의 중공군 기습과 포위 속에서 견뎠다. 미군의 공중보급이 신기했고 우리들 모두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한 것이 다행이었으나 압록강을 목전에 두고 후퇴한 것이 못내 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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