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경주의 시와함께]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1952~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중략

(부분.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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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작곡가와 약속한 미팅 자리에 십오분 늦은 적이 있다. 그는 몹시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작곡을 하는 자신에게 십오분이라는 시간은 엄청난 것이라는 이유였다.

매일 악보 속으로 들어가 음역을 분 단위를 나누고, 그것을 다시 몇 초로 쪼개고 거기에 선율과 악상을 밀어넣는 작업을 하는 자신을 나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짜증을 부렸다.

타인이 시간 약속을 어기게 되면 자신에겐 그 기다림의 시간들이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린다는 것이다. 약속되지 않는 초과의 기다림은 자신에겐 음역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를 달래는 동안 십오분이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그에게 이 시가 실린 페이지에 작은 메모를 넣어 그에게 이 시집을 보내주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기다림만큼 드물고 귀한 시간도 없습니다. 시인은 세상의 시간보다 행간의 시간에 서식지를 만들려는 자들입니다. 좋은 음악과 좋은 시에는 이 시처럼 침묵이 지나가며 만들어지는 행간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삶이 셀 수 없는 기다림의 연속인 것처럼, 삶을 달래는 데에도 일생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신과 나의 행간이 깊어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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