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자참여마당] 수필: 세배는 가야지

#세배는 가야지

병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병신년이라고 하니 별로 어감이 안 좋은 것 같네요. 붉은 원숭이라 해도 별로고요, 귀여운 원숭이의 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원숭이같이 지혜롭고 실수 없는 한 해가 되길 빌면서 세배의 소감을 적어 봅니다.

세배는 다녀오셨나요? 설날 차례를 지내고 집안 어른들께는 세배를 했겠지요? 손자들에게 세배를 받고 잠시 뭘 하는 사이에 큰 손자가 와서 "봉투, 봉투 열렸네" 해서 잠깐 기다리라고 했더니 영 안 좋은 표정으로 나가는군요. 어린 아이들이 세뱃돈에만 관심을 가지고 세뱃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세배를 하는 것 같아요. 돈으로만 평가를 해서 아버지는 얼마, 큰아버지는 얼마, 모두를 돈으로 평가합니다. 친구들과도 너는 세뱃돈 얼마 받았니? 나는 얼마를 받았는데, 자랑이라도 하듯 합니다. 우리 집이, 내가 세뱃돈이 더 많으니 더 부자인 듯 잘사는 듯 자랑인 듯 하는 걸 보니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황금만능주의가 어린이들에게까지 깊이 뿌리내린 듯합니다. 한마디 하려다가 아들과 며느리도 있고 해서 씁쓸하였지만, 꾹 참고 세배를 갑니다.

초하룻날은 차례를 모시고 이럭저럭 집에서 보냈고, 이튿날은 산소에 다녀오고, 오후에는 고향에 계신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초사흗날에는 선생님께 세배를 다녀왔습니다.

세배를 가는 선생님은 한 분뿐입니다. 제자들 몇 사람이 모여 선생님 댁에 세배를 갔습니다. 선생님께 세배를 드리고 세배를 간 사람들과도 같이 세배를 하고, 설 술을 한잔 마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모 문학단체에서 강의를 하셨는데 강의료를 많이 받으셨다며 세뱃돈이라 하시며 모두에게 만원씩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안 받을 수도 없고 서로 눈치를 보다가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겨우 설이라고 술 몇 병과 조그만 선물이 전부였는데 뒤통수들 긁적이며 선생님 댁을 나왔습니다.

선생님 댁을 나와 한 친구가 설 술을 한잔 사겠다고 해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선생님의 세뱃돈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선생님께서 큰 선물을 바라시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제자들이 이렇게 모여 세배를 온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실 테지." 뭐 받아도 괜찮다는 쪽으로, 그래도 그렇게 하시기가 쉽지는 않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모아지고 회갑이 지나서 세뱃돈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좋아들 합니다. 나도 오늘부터 제자들이 세배를 오면 제자들에게 세뱃돈을 줘야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기분 좋게 양껏 마시고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오는데 제자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지금 선생님 댁에 세배를 가려고 몇 사람 모여서 전화를 합니다." 집에 없고 안 와도 된다고는 했지만 택시 안에서도 세뱃돈 줄 생각에 은근히 기다려집니다. 나이 많은 선생님께 한 수 배웠습니다. 나도 제자들이 세배 오면 세뱃돈 주는 것을. 나이가 들어 세뱃돈을 받으니 이리 좋은데 제자들 또한 기쁘지 않겠습니까.

안영선(대구 수성구 청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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