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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의 시와함께] 무명시인-함명춘(1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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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중략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부분. 『무명시인』. 문학동네. 2015)

시인은 홀로 연필을 깎는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 들어와 연필을 깎으며 살기로 한 사람이다. 그는 연필을 깎으며 마른 나무 같은 글들을 노트 속에 심기 시작한다.

한 그루 연필이 노트 속으로 들어가고 또 한 그루의 연필이 노트 속에 심겨지는 동안 세월이 갔다. 그가 그 방으로 들어와 열심히 연필을 깎았기 때문이다.

연필로 시를 쓰면 볏짚 타는 냄새가 나고, 저물 무렵 연필 속에서 흘러나온 글씨 속에는 비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비가 오는 날 젖은 볏짚이 타는 냄새를 쓰고 싶어서 그는 혼자 연필을 깎는 사람이다. 감추어 두었던 울음이나 세상이 자신을 지나가며 남겼던 것들이 혼자 헛웃음이 되면 그의 연필에서 흘러나온 젖은 볏짚들은 두엄이 되어 노트 귀퉁이에 쌓여간다.

그와 함께 그윽하게 썩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는 시인이다.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에 없는, 허명을 남기는 일보다 자신의 노트 속에 새들을 남기겠다고 다짐한, 그래 진짜 시인은 부러진 연필을 깎아 새들을 불러 모으는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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