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하거나 청순하거나.
양립하기 힘든 이 두 이미지를 배우 김혜수(46)는 보여준다. tvN 금토 드라마 '시그널'에서다.
현재의 베테랑 여형사 차수현은 섹시하고 강렬하다. 시체를 들여다보고, 범인을 맹렬히 추적하며 바싹 마른 감정을 토해내는 순간에도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20년 전 운전도 제대로 못 하던 신참 순경 차수현은 파릇파릇하고 청순하다. 거친 선배들의 구박과 면박을 꼼짝없이 당해내며 까맣고 커다란 두 눈을 끔뻑끔뻑 대는 그에게서는 순수하고 순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이쯤되면 1인2역이다. '시그널'에서 현재와 회상신을 무시로 오가며 이 두 가지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선보이는 김혜수에게 시청자는 브라보를 외치고 있다.
◇ 연기 30년이 만들어낸 차수현…'깜보'에서 '차이나타운'까지
'시그널'의 차수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다. 김혜수 연기인생 30년의 노력과 경험이 자연스럽게 쌓여 만개한 꽃인 것이다.
솜털 보송보송한 열여섯의 김혜수는 1986년 영화 '깜보'를 통해 데뷔했다. 장두이가 타이틀 롤을 맡고 박중훈과 김혜수가 조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김혜수는 깜찍한 '제비' 소녀 나영을 연기했다.
그는 이후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 '사모곡' '순심이' '춘향전' '세노야',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딸' '어른들은 몰라요' '잃어버린 너' '첫사랑' 등을 통해 청순함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시그널'에서 1980~90년대 차수현의 모습은 실제 김혜수가 데뷔 후 1990년대 초반까지 대중에게 어필했던 이미지 그대로다. 달덩이처럼 예쁘고 환한 김혜수는 소녀와 여인의 중간지점에서 꽃같은 순수한 이미지로 사랑받았다.
김혜수는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섹시한 이미지로 바뀐다. 대학생활을 거치며 성인이 되고, 통통하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외모적으로도 변화를 맞은 그는 큼지막하게 그린 눈썹 라인으로 대표되는 진하고 화려한 메이크업과 성적인 코드를 가미한 캐릭터를 통해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영화 '남자는 괴로워' '닥터봉' '미스터 콘돔'과 드라마 '도깨비가 간다' '짝' '사랑과 결혼' '연애의 기초' '사과꽃 향기' '미스 & 미스터' 등의 작품을 통해 그는 1990년대 후반 섹시한 건강미를 과시했다.
그랬던 그는 다시 2000년 전후로 섹시함을 걷어낸, 밝고 씩씩하거나 청순한 코드로 승부했다. 영화 '신라의 달밤' 'YMCA 야구단'과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국희' '황금시대'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드라마 '장희빈'(2002~2003)과 영화 '얼굴 없는 미녀'(2004), '타짜'(2006)를 거치면서 다시금 변신했다. 이번에는 섹시함에 치명성을 더해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구축했고, 체중 감량에 성공한 날씬한 모습으로 30대 중반 이후 새로운 이미지를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이어 40대 전후로 한껏 원숙해진 그는 영화 '모던보이' '도둑들' '관상' '차이나타운'과 드라마 '스타일' '즐거운 나의 집' '직장의 신'을 거치면서 이제는 어떤 역할도 동시다발적으로 거침없이 소화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도덕이 무너진 시궁창 속의 캐릭터부터 꼬리가 아홉개 달린 여우, 냉정하고 도도한 캐릭터와 무표정의 능청스러운 계약직 직장여성까지 종횡무진 오가며 그는 매번 감탄을 자아내는 변검술을 선보였다.
◇ 20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차수현…'점오'에서 '팀장'까지
2015년 경찰청 장기미제전담팀장인 차수현은 '조폭을 동네 동생 다루듯 하는 카리스마'에 어떤 육탄전도 마다않는 싸움 실력과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형사다.
'어지간한 일로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는 대부분 무표정이고 무미건조하다. 늘 삶의 고뇌와 무게를 짊어진듯 우수와 상념에 찬 표정이고, 종종 경험하는 경찰 조직의 부조리 앞에서 괴로워하면서도 형사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워커홀릭이다.
살이 한층 더 빠진 김혜수는 기름기 하나 없는 얼굴로 온갖 험한 현장을 몸소 뛰어다니며 파워풀한 베테랑 형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20년 전 신입 여경으로, 경찰 봉고차 운전도 제대로 못해 선배들에게 한사람 구실도 못한다며 '점오'라는 별명을 얻은 차수현은 의욕은 충천하지만 겁도 많고 어리숙하다.
선배들 책상 정리와 커피 심부름 등 주로 잔일을 하고, 지금보다 훨씬 남성 중심이었던 경찰서에서 초짜의 홍일점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눈치밥을 먹으며 숨죽여 애면글면 노력하는 과거의 차수현은 앳되고 사랑스럽다.
마흔여섯의 김혜수가 20년 전의 신참 차수현을 연기하는 데 있어 걸림돌은 없다. 그와 극중 과거에서 호흡을 맞추는 배우가 덩치 큰 조진웅이라는 점이 플러스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김혜수의 동안과 능수능란한 연기력이 조화를 이룬 덕분이다.
바로 직전 장면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듯 건조했던 현재의 차수현이 다음 장면에서는 수분을 한껏 머금은 싱싱한 과거의 차수현으로 바뀌어도 시청자는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20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김혜수의 1인2역이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시청자가 "김혜수 때문에 '시그널'을 본다"고 말한다.
'시그널'은 지난 26일 11화가 평균 시청률 10.9%, 순간 최고 시청률 13.5%를 기록했다.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된 장르 드라마가 시청률 10%를 넘긴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성과다. 지상파 부럽지 않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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