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법의 역설은 욕망의 구조와 쌍생아처럼 닮아 있다. 2진법은 2라는 숫자를 사용하지 않으며 10진법은 10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즉 2진법은 0과 1만을 사용하고 10진법은 0부터 9까지의 숫자만 사용한다. 이를테면 2진법에서 1 다음의 숫자는 2가 아니라 10이다. 그다음은 11, 그다음은 역시 12가 아닌 100. 마찬가지로 10진법에서 9 다음은 10이 아니라 1과 0의 계열체, 10이다. 충족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제로로 덮어씌워진다. 요컨대 2진법에서 2는, 10진법에서 10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숫자, 충족되지 않음으로써 충족되는 숫자다. 우리의 욕망은 충족되었다고 믿는 순간 결핍된다. 따라서 결핍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충족을 연기시키는 도리밖에 없다.(김경욱의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 중에서)
남자가 오랜만에 극장에 갔다. 극장표를 들고 자리를 찾았는데 그 자리에는 다른 여자가 이미 앉아 있었다. 극장표를 대조해 보니 같은 번호였다. 극장 측의 실수. 남자는 계단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여자는 본의 아니게 미안하다고 했다. 남자는 영화를 보면서 여자를 지켜봤었다. 평범한 얼굴이지만 여자의 덧니가 매력적이었다. "미안하면 차나 한잔 사 주세요." 여자와 커피를 한잔하고 값을 남자가 지불했다. 여자는 정말 미안하니까 편하게 영화 한 번 더 보라고 영화표를 예매했다.
남자는 여자와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았다. 만남은 계속되고… 키스하고 잠자리까지 함께했다. 꼬박 2년이 걸렸다. 그런데 잠자리까지 같이한 다음 날 여자는 이빨에다가 치아교정기를 끼고 나타났다. "내 콤플렉스인데 예쁘다고 해서 고마워요." 사랑을 확인한 다음 순간, 남자에게 더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정말 여자의 덧니를 사랑했다. 둘은 점점 멀어졌다. 치아교정기를 뺀 이를 보지 못한 채 남자는 여자와 이별했다.
남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교에서 시간강사를 했다. 은행에 통장을 개설해야 했다. 마감 시간이 임박하여 은행에 들어갔을 때 은행 직원이 된 여자를 다시 만났다. 여자는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치아교정기가 없어진 그녀는 흐른 시간만큼이나 세련되어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다시 시작되었다. 결혼 적령기가 된 그들은 결혼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다. "이제 은행 그만 나가야겠어." 덕분에 남자는 생활을 위해 학원에도 출강해야 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둘은 이혼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남자는 친구의 소개로 만난 어떤 여자와 미술관에 갔다. 거기에서 이혼한 여자를 우연히 만났다. 미술관에서 만난 그녀는 무척 활기가 있었다. "다음 주에 일식점을 개업해." "니가 회를 뜨기도 하니?" "아직 익숙하지 못하지만 노력하고 있어." 남자의 머릿속에는 회를 뜨는 여자가 떠올랐다. 돌아서서 걸어 나가는 여자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김경욱의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은 이런 이야기이다. 우연이 운명으로 포장되면서 대부분의 낭만적 서사는 출발한다. 우연한 영화관에서의 만남, 다른 은행 전출하기 바로 전날의 만남, 미술관에서의 만남 등이 그것이다. 물론 그런 만남이 영원한 지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충족되는 순간 결핍이 발생하는 것이 낭만적 서사의 특징이니까. 따라서 결핍되지 않으려면 충족되지 않아야 한다. 아, 이 어려운 역설.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도 존재하진 않지만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결핍이 존재하는 한 사랑은 지속되는 것이 묘한 진실이다. 결국 결핍이 지속적인 사랑을 만들어가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낭만적 서사조차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이 시대의 슬픔이기도 하다.
'천국의 문'으로 2016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김경욱. 이 소설은 2004년에 발표한 그의 숨겨진 수작(秀作)이다. 개별성이 중시되는 시대, 누구나 개성을 말하는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현실. 모두가 결핍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핍을 숨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지금, 여기'. 결핍을 드러내는 것이 모멸로 나타나는 시대, 3포, 5포를 넘어 다포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는 사랑하기도 어렵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