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오늘 하루는 작정하고 놀아보자. 휴대폰 속으로 빠져들어갈 듯이 게임도 하고, 이 썩는다고 살찐다고 못 먹게 했던 간식도 실컷 먹고, 평소 가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말도 못 꺼냈던 곳에 가보자고 떼도 써보자. 1년 365일 중에 적어도 오늘 하루는 그래도 되는 날이다.
옛날 생각하는 어른들은 중간고사 성적 때문에 행여 아이들이 기죽을까 봐 걱정하겠지만 2012년부터 대구에선 초등학교 중간고사가 사라졌다. 하필이면 중간고사 끝날 즈음에 '어린이날'이 있어서 공부와 담 쌓은 아이들이 이날조차 큰소리 못 치던 일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래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선 아이들이 건강한 정신과 몸을 갖춘 시민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됐다. 걸음마 떼기 무섭게 영어 유치원에서 2개 국어(중국어까지 한다면 3개 국어)를 동시에 습득해야 하고, 초등학교에 가면 본격적인 경쟁 무대에 뛰어들어 동네 교습학원부터 잘 가르친다고 소문난 이웃 동네 영어'수학 학원까지 섭렵해야 한다. 중'고교는 말해서 뭐할까.
엄마도 힘들다. 아이 시험 잘 쳤다고 소문나면 처음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가 조금 뒤엔 온갖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아이가 그저 그런 성적을 거두면 엄마도 동네에서 그저 그런 엄마가 되고, 아이가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면 엄마는 지지리도 못난 사람이 돼 모임에도 못 간다.
이런 상황을 우리 아이들이 모르고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아이들은 다 안다. 알아도 너무 잘 안다. 부모가 잔소리 좀 할라치면 눈을 치켜뜨고는 고래고래 고함부터 지르는 아이도, 만사 귀찮다는 듯이 매사에 의욕도 없고 하는 일도 없이 축 늘어져 있는 아이도, 세상에 이런 아이 없다 싶을 만큼 부모 말 한마디면 척척 알아서 하는 그런 아이들도 다 안다. 어떻게 처신해야 그나마 집안이 조용하고, 자신이 숨을 쉴 수 있고, 내일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불쌍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애 좀 그만 잡아. 우리 땐 다 알아서 공부했잖아. 때가 되면 저도 알아서 공부해야 한다고 느낄 때가 올 거야." 대한민국 남편들이 한 번쯤은 뱉어본 말이다. 그러면 아내들은 마치 공식처럼 이렇게 답한다.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 우리 아이가 제대로 밥벌이도 못하면 좋겠어. 남들처럼 고액 과외는 못 시켜도 최소한 비슷하게는 시켜야 할 것 아냐. 도와주지 못할 거면 간섭도 하지 마."
자녀 교육을 두고 아내와 싸워서 이기는 대한민국 남편은 적어도 필자가 아는 한 없다. 물론 남편도 자녀 교육에 대한 근사한 철학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박봉에 아이 학원 보내랴 과외 시키랴 걱정이 쏟아지다 보니 괜스레 아내한테 핀잔을 준다. 연봉이 수억원이면 잔소리할 일도 없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등바등 한 번 해보겠다는데 남편이라는 인간은 도와줄 줄 모른다.
부모도 힘들지만 요즘 세상에 아이로 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해거름에 "아무개야! 밥 먹어라"하고 골목이 떠나갈 듯 고함을 쳐야지 집에 들어가고, 밥 먹고는 텔레비전 앞에서 일일연속극 다 보고 9시 뉴스 알림이 나와야 잠자리에 들던 사람이 바로 우리다. 그래놓고 아이들한테는 세상이 달라졌으니 게임도 하지 말고 텔레비전도 보지 말고, 일찍 자지도 말고, 친구랑 놀지도 말라고 한다. 솔직히 요즘 어른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 세상이라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자식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게 고마운 세상이 됐다. 심장이라도 꺼내줄 그런 자식이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고, 수학여행 간다며 환하게 웃고 집을 나선 뒤 차디찬 바다에 빠져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을까. 부디 이제부터는 세상모르고 뛰어노는 아이 모습에, 그러다 지쳐 침까지 흘리며 곤히 잠든 아이 모습에 무한히 감사하자. 그게 가슴에 자식을 묻은 다른 부모들에 대한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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